이적목사·코리아연대 농성90일·단전13일째인 7일, 12번째 <별밤>(농성장, 별이 빛나는 밤에)1부는 서대문마을활동가, 풀뿌리여성단체 <너머서> 전미옥공동대표와 함께 했다.

서울YMCA의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다  

서울YMCA활동가였던 전미옥씨는 5만여명의 큰 조직인 서울YMCA가 남성들만을 총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해 그에 맞서 싸웠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어 <현장에서 10년활동 했는데 왜 이사로 올라갈 수 없는지 당시 서울YMCA의 비민주성이 심했다.>며 <이사회에 20년간 서로 뽑아주고 뽑던 그 관행, 카르텔속에 여자가 들어가는 것을 원치않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차별은 원시적인데 지금도 그 문제가 있다.>며 <너무나 말도 안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회자 한준혜농성단원은 <당시 서울YMCA에서 여성은 총회구성원으로 인정이 안돼 난리가 났었고, 조선시대인가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 투쟁을 이끌었던 분과 앉아서 사회를 본다는 게 영광스럽다.>며 <그 투쟁을 10년간 해왔던 주인공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후 전미옥씨는 YMCA안에 있던 회원들이 밖으로 나가 모임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성프라자안에서 3년간 인큐베이팅장소를 제공받다가 나갈 때 한팀은 중앙에서 하는 운동은 끝났다며 풀뿌리운동을 시작했고, 나는 다문화활동 하는 분이 계셔서 강북에서 다문화어린이도서관을 열어서 거기 찾아오는 엄마들 한글을 가르치고, 꼬마들을 교육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넓혀가는 마을활동

이어 <남자들은 자기일터로 가면 마을, 이웃과의 연관을 잘 안가지는데 여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밑에 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점이 조금은 다른 것 같다.>며 서대문마을활동이야기를 꺼냈다. 전미옥씨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짜 힘>이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 이 관계를 넓혀가는 게 마을>이라고 설명했다. 또 <(도시사람들도) 마을에 대한 향수들이 있다.>며 <서울에서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둘씩 두드려보면 사실 다들 외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을활동을 하면서 만난 강순영농성단원과 함께 한 일화들을 풀어냈다. 강순영농성단원에 대해 전미옥씨는 <젊은 친구가 굉장히 빠릿빠릿 생기발랄하고 아기를 들쳐 업고 밤새 회계보고 그러더라. 저 사람 못하는 게 뭐야라고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재미는 없는데, 굉장히 강직하고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이라며 <두드리면 다 나온다.>고 말했다. 또 <한분야만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 사람은 다 잘한다.>며 <서대문에서는 여기 기독교회관농성장을 <출장소>라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강순영씨 덕분에 1월에 유럽에 다녀왔다.>며 유럽협동조합연수이야기를 시작했다.
<협동>을 주제로 떠난 유럽연수 

<협동>을 주제로 유럽연수를 다녀왔다는 전미옥씨는 스페인 몬드라곤, 이탈리아 볼로냐, 프랑스 생주니앙 등을 찾아 현지 협동조합관계자들을 만난 일화, 유럽의 협동조합운영방식, 여행중 고생했던 경험 등을 전했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에게 몰수한 땅을 유기농농가에 나눠준 곳을 찾아간 일, 못사는 도시였다가 이탈리아에서 3번째로 잘사는 도시가 된 볼로냐의 협동조합사례, 스페인 몬드라곤에서 협동조합이 발달한 계기, 1명의 시장과 9명의 부시장이 운영하는 진보정당 집권지역 생주니앙의 사례 등을 들려주었다.  

강순영농성단원은 <유럽에 갔다와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보고대회를 했다.>며 <1주일간 준비해서 주민들과 관심자들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별밤>참가자들과 <협동경제유럽연수> 영상을 함께 봤다. 영상시청후 한준혜사회자가 <동네에서 국제포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하자 전미옥씨는 <저분들과 관계를 맺었으니까 동네에서 불러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현재 마을사람들과 골목국제포럼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네에서 늘 보던 사람들 아이들과 떨어져있어 안타까워  

전미옥씨는 <사실 진보당이 뭔지 모르고 여기 무슨 일 때문에 모여 앉아 있는지 잘은 모른다. 다만 상훈씨, 둥이아빠 등 동네에서 늘 보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리가 없는데 여기에 있다. 정권에서 꺼리는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좋은 일일 거다.>라며 <아이들과 떨어져있어 너무 안타깝다.>는 심정을 전했다. 그러면서 <대의명분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시절이 와서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미옥선생에게 고맙단 마음을 표현해 달라.>는 사회자의 주문에 강순영농성단원은 <만났을 때도 지금도 큰 힘을 주는 분>이라며 <이모같은 활동가라고 적었는데 나에게는 그런 묵직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문제를 헤쳐나가는데 의지가 되는 선배님이자 지역에서 젊은 엄마들에게 비빌 언덕이 돼 주는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또 전미옥씨가 서울YMCA에서 일하던 시절 아기가 종각지하철역까지 갔던 사건을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분은 나와 같은 과일 것이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전미옥씨와의 만남은 신청곡 김민기의 <봉우리>를 들으며 <별밤>1부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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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다리를 만드는 게 꿈이라던 평범한 대학생 

<별밤>2부는 <용감한 엄마> 김정희농성단원과 함께 했다. 
양고은사회자는 <큰 다리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김정희농성단원의학생시절을 물어보았다. 

김정희농성단원은 <큰 다리라기보다는 튼튼한 다리를 짓고 싶었다.>며 <성수대교붕괴사건을 보면서 튼튼한 다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시절 다른 대학생과 비슷했다. 과생활과 클래식기타 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했다. 술도 많이 먹고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소개했다.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이 운동의 계기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김정희농성단원이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로 정세이야기도 하고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토론도 했다. 그것이 여기까지 오는데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배우자와 이후에 만났던 연구소사람들과 토론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운동에 대한 확신이 섰고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토목공학과복수전공후 토목회사에 취직해서 설계쪽일을 했다.>는 김정희농성단원은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사회구조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못하겠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어 <내가 튼튼한 다리를 짓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이 다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짓고 그 다리를 건널 때도 뿌듯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며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결혼하면서 지역으로 내려가 활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역활동시절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기와의 싸움 

사회자는 <지역활동시절 정희언니네 집에 가서 냉장고문을 열면 텅 비어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김정희농성단원의 지역활동시절에 대해 물었다. 

김정희농성단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그에 맞춰 살면 되니까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는데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이어 <운동을 하면서 여러가지 오류도 범하고 부족했던 부분들이 눈에 보였다.>며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부족함들인데 이것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 <부족점이 보일 때는 되게 힘든데 그것이 극복됐다 느껴지는 순간은 성취감과 자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진보정당, 성평등교육문화센터, 디자인협동조합 활동 그리고 육아 

김정희농성단원은 <둘째아이를 3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고 활동을 했다.>며 운동과 육아, 경제생활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집안일을 할 때도, 아이들을 돌볼 때도 그 과정속에서 나와 싸웠다.>고 말했다. 또 <내가 버겁거나 문제가 잘 안되고 힘든 것들이 있으면 토론하고 함께해야 하는데 나혼자 끙끙 앓아서 비판도 받았다.>며 <그걸 혁신하는 과정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민주노동당 충남도당활동으로 운동경험을 쌓아나가고 비례대표에도 출마했던 일과 이후 성평등교육문화센터와 디자인협동조합을 운영했던 경험을 들려줬다. 

<당활동, 성평등센터, 협동조합 활동을 했는데 큰 중심이 됐던 것은 연대, 특히 노동연대>라고 말하는 김정희농성단원은 <연대는 연대를 하는 사람, 연대를 받는 사람 서로에게 있어서 생명인데 이 연대에 대해서 어느 누가 하라마라 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명을 끊는 거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농성은 학교, 대학을 다시 다니는 느낌

마지막으로 <아이를 놓고 농성장 들어오는 결심이 쉽지 않았겠다.>는 사회자의 말에 김정희농성단원은 <엄마가 강해야 한다. 아이는 강하다.>며 <농성 들어오면서 아이들이 많이 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가협총회에 딸과 함께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상영된 사진과 영상을 딸에게 설명해 주었더니 <딸의 눈빛이 엄마가 구속되면 피켓을 들 기세였다.>고 이야기했다.

또 <농성이 학교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뭔지 알 거 같다.>며 <대학을 다시 다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서로가 크는 것 같다. 나도 크고 있고 옆에 있는 동지들도 크고, 후배들도 크고 있는 것 같다.>며 <농성하는데 힘들기보다는 희망찬 기분들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김정희농성단원과의 <별밤>2부는 여자후배들의 이어지는 질문에 예정된 시간을 넘기며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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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제휴 : 21세기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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