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목사·코리아연대의 농성 83일차인 3월31일 기독교회관7층, 오후9시 6일째 단전과 동시에 5일차 <별밤(농성장, 별이 빛나는 밤에)>이 시작됐다. 


0331 별밤1부 사회자1.jpg



닭이 알을 품듯이 농성단원들을 지켜준 분


이날 사회를 맡은 한준혜농성단원은 <강물 가듯이 바람흐르듯이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한 뒤 <이 자리를 빛내주신 분이 계신다. 닭이 알을 품듯이 품어주신 분이 계신다..>며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이사장 송무호선생을 무대로 모셨다.


송무호선생이 나오자 이상훈부단장이 일어서서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결전의 전장으로>라며 선창하고 참가자들이 함께 <결전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사회자는 <80년대 버전으로 인사를 드렸다. 맘에 드시는지 모르겠다.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품어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며 감사의 인사부터 드렸다.


송무호선생은 <이렇게 와주신 분들 감사드린다. 닭이 알을 품었다고 하는데 제가 알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못된다. 과분하다. 최근에 저도 이런 쪽으로 열심히 해보려고 한 게 얼마 안된다.>며 <한편으로는 요청이 된다면 주제가 넘더라도 조금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청중은 일제히 <와>하면서 박수를 치며 연호했다. 사회자는 <다음 월요일 송무호선생과의 토크쇼를 예고하겠다. 팟캐스트를 현장실황으로 하니까, 그때 다시 뜨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0331 별밤1부 송무호1-1.jpg

0331 별밤1부 송무호2.jpg


0331 별밤1부 송무호4.jpg


0331 별밤1부 송무호1-2.jpg



<아저씨,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불 꺼야죠>


또 <여기가 마치 라디오방송인줄 알고 (많이들) 착각해서, 나 스스로도 라디오방송 디제이(DJ)인지 팟캐스트를 하는 건지 헷갈린다.>며 신청곡 듣는 시간으로 넘어갔다. <응원의 메시지를 하나 읽도록 하겠다. 멀리 양구에서 신청곡이 들어왔다. 양구에 계신 부부 사연이다.>라며 부부의 사연을 낭독했다. 부부의 신청곡은 <땅의 사람들>과 <바쳐야 한다>였다. 미리 악보를 준비해온 이미숙농성단원이 <바쳐야 한다>를 노래했고 참가자들도 함께 불렀다.


사회자는 <80년대 분위기가 물씬나는 것 같다. 생활방이 7층에 있다. 어제 갑자기 8시28분에 경비아저씨가 올라왔다. <아저씨,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니 아저씨가 <왜요?> 하길래 제가 <불을 꺼야죠>라고 말했다. 아저씨가 <불 끌꺼예요>라며 황당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며 갔다. 이렇게 해서 별밤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잠깐이라도 <쪽수>의 황금기를 누렸던 학번들


사회자는 <80년대 군사독재시절에 파쇼정권에 대항해서 젊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투쟁했던 이야기를 듣겠다. 선배님들의 투쟁이 있기에, 고문이나 물리적인 폭력에 맞섰기에, 지금은 그나마 고문은 없다는 것. 너무나 감사하다.>며 <오늘은 이분들을 모시고 야사를 듣도록 하겠다. 세분의 선배님들께 팁을 드리면 야사다. 야사가 아니면 편집을 하도록 하겠다.>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네분을 모시도록 하겠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때는 의장옹립식 할 때 배타고 그랬는데 네선배님들을 모시면서 구호를 힘차게 외치겠다. 네분이니까 4개 외치겠다. 신촌5거리에서 <아지(선동)>뜬다고 생각하시고 구호 4개를 외쳐달라.>고 주문했다.


한 참가자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외치자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우영옥회장(80학번), 지미자사무차장(88학번), 김영운총신대민주동문회회장(85학번), 유영오회원(84학번)이 무대로 나왔다. 참가자들은 힘찬 박수로 맞이했다.


사회자가 <김영운회장은 농성단원이신 것 같다. 사회를 같이 하시면 될 것 같다.(웃음) 제 남편이 79학번이어서 80년대 학번은 다 커버할 것 같다.>라고 말하자 김회장은 <썰렁합니다.>라고 응수했다. 


우영옥회장은 <저는 79학번이자 80학번인 우영옥이고 이상훈대표의 학교선배다. 동문회를 맡고 있다>며 인사했다. 유영오회원은 <농성장을 와야지와야지 하다가 이제 왔다. 죄송하다. 공안탄압의 피해자분들인데. 저도 경험이 있어 동지라는 느낌을 갖는다. 연세대동문회 84학번 유영호다.>고 인사했다. 김영운회장은 <저는 연짱 오고 있다. 비가 올 때 생각나는 80년대 추억이 있다. 예전에 89번종점 사당동에 모여서 밤새 사는 얘기, <전두환 잡자.>는 얘기 했던 생각이 난다. 85학번 김영운이다.>라고 인사했다. 지미자사무차장은 <전국민주동문협의회 88학번 지미자라고 한다. 90년도이후에 한총련탄압이 있었는데 잠깐일망정 <쪽수>의 황금기였다. 그 황금기를 누렸던 지미자라고 한다.>고 인사했다.


사회자는 <80년대 선배님들을 모시니까, 제가 기가 센 편인데 오늘은 밀린다. 우리 후배대학생들도 와있는데, 전대협야사집을 보고 선배님들이 얘기해줬던 홍길동을 연상케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랐다.>며 <얘기하기 편하게 단어 하나를 던지겠다. 필름이 지나갈 것 같은데 첫번째는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던 기억에 남는 선배들을 이야기해달라. 88학번은 운동의 번성기였다. 이정희전대표같은 사람이 1000명이 넘었다고 혹자는 그랬는데 그 시대를 살았다는 지미자선배에게 먼저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사람이 수단이 되면 안된다>는 뼈저린 교훈


지미자사무차장은 <개인적으론 현재의 모습과 상관없이 89년도 전대협2기출범식때 누가 뭐래도 임종석이었다. 나름의 신화를 창조했던. 내가 지방의 원광대를 다녔다. 어느날 선배가 불러서 갔더니 놀란 표정으로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얘기하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우리학교에 임종석이 왔다갔다고 한다. 당시 학교정문을 같이 지킨 사람이 지금의 신랑이다.>라고 하자 청중에서 탄성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어 <한양대로 들어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열차와 열차 사이를 죽어라 뛰었다. 당시 활성화되던 철도노조측에선 걱정말고 천천히 뛰라 말했다고 한다.>는 일화를 말했다. 


김영운회장은 <사람얘기를 키워드로 줬는데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만났던 선배들이 생각난다. 학도호국단이라는 관변총학생회가 전환되는 시기였다. 1학년때 선배들이 술먹자는 꼬임에 넘어가 운동하게 됐는데(웃음) 85년도 5.3인천투쟁서부터 반합적인 가투(가두투쟁)를 많이 했다. 가리봉오거리에서 가투간 뜬다고 하면 5분이면 상황이 끝난다. 바로 검거되는 그런 힘든 상황에서 했다. 그때의 선배들이 기억에 많이 난다. 나 역시 50이 넘어 이 사회를 끌고가는 기성세대가 됐는데 그 시절 애국의 계기를 만들어준 선배들이 많이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유영오회원은 <갑자기 질문을 해서 먼저 한 분들 컨닝을 했다.>면서도 <비전향장기수어르신들을 보면서. 제가 아는 분중에 최고로 많이 사신 분이 44년이다. 감히 묻는 것도 어렵고 지켜볼 뿐이다.>고 당시 비전향선생님들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우영옥회장은 <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내 머릿속에 왜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어떻게 보면 제가 열심히 활동했던 20대의 활동이 사람이 중심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 스스로도 그랬고 당시의 운동도 그러지 않았나 생각했다. 내가 79학번이기도 하지만 학교를 때려 치고 80학번으로 다시 들어갔다. 캠퍼스의 낭만을 생각했는데 남자도 없고 그랬다.(웃음) 다시 학교에 입학을 했고 80년부터 운동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79년까지는 동아리로 움직였다. 2학년때부터 언더학회라 해서 이론적으로 공부를 했고 데모를 할 때도 누구누구는 몇월달 누구누구는 몇월달 그랬다. 현장으로 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떻게어떻게 하라고 지역으로 보내고 노동운동을 했다. 사람이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고 남산으로 가고 유치장으로 갔다. 공권력에 노출이 돼서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과 둘다 남산에 갔다. 지금의 남편은 노동활동을 하고 나는 벌어야 하니까 돈벌이중심으로 살았다. <세월>호사건이 나서 한달동안 우울했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고 내가 몇십년동안 한 것이 없기에 어느 단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동문회활동을 하고 있다. 이 활동을 하면서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 사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견지하려고 한다. 민동활동을 한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회장직을 맡아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과거의 경험과 마음아팠던 생각을 떠올리려 한다. 언제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지는 모르겠다. 혹시 내가 사람을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가차없는 비판을 해주시라.>고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10여명과 수천·수만명의 싸움에서 이긴 비결


계속해서 사회자는 <정말 싸우면서 <통쾌했다>라는 기억이 있으면 얘기해달라.>면서도 <물론 기소유예가 지난 이야기라는 걸 공안당국이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말해 청중을 웃겼다. 


유영오회원은 <87년 6월항쟁때다. 신촌술집에서 술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친구가 뒷골목에서 한열이가 죽었다고 했다. 밤 11시쯤 됐다. 그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세브란스로 들어갔다. 세브란스영안실에 갔는데 스무명정도가 지키고 있었고. 정말로 많은 경찰이 통제를 했다. 경찰하고 10미터사이로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82학번선배가 더이상 오면 불질러버리겠다며 석유통이랑 폐타이어를 쌓아놓았다. 정말 고립돼 있었고 긴장됐다. 학생은 없고 경찰만 수없이 많았다. 결국 기세였다. 새벽내내 대치하다가 다음날 경찰이 빠졌다. 10시간동안 긴장돼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10여명과 수천·수만명과의 싸움에서 이겼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6월항쟁을 맞았다.>고 뜨겁게 회상했다.


김영운회장은 <어찌보면 똑같다. 군대영장이 나오면 제국주의군대는 가지않겠다 결의하고 <군도발이(군복무거부)>를 쳤다. 그때는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으면 군대를 면제해줬다. 그때쯤에 서울지역에서 4~50명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군대는 절대 가지않겠다고 결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기 있는 동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가라며 지향점이 흔들릴 때가 있다. 역시 최고는 사랑하는 가족과 동지들이 나를 신뢰할 때다. 여기를 방문하지않아도 많은 양심적인 분들이 투쟁하는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웃으면서 했으면 좋겠다. 동지들의 투쟁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통일을 앞당긴다. 80일정도 되면 지치고 힘들텐데, 더 힘내고 열심히 싸워 달라. 승리로 보답이 될 거다.>고 힘차게 격려했다.


지미자사무차장은 <87년도에 민주화가 됐다고 말한다. 고3때 성당에서 광주(항쟁)비디오를 보게 됐다. 당연히 봐야만 하는 세대였다. 그리고 대학을 들어왔다. 광주와 통일이 이슈였다. 민주화에 자신감을 가지고 통일로 이슈가 옮겨지고 있는데, 그때 광주를 많이 이야기했다. 또 기억나는 건, 89년 8월에 각지역별로 학생들이 모여 <어머니의 노래>라는 영화를 보고 있는데 임수경전대협대표가 지금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더라. 정말 멍했다.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게 어떻게 비춰졌나면 <(북은) 동포고, (당연히)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이 외쳤던 구호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였다. 어떻게 왜곡을 하고 있든 <만나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통일운동에 대해 추억했다. 



<노동현장에서 해고된 후 소송해서 이겨 집사는데 보탰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사회자는 <다시 구호를 외쳐달라.>고 주문했고 전민동회원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외쳤다. 청중들은 80년대선배들의 열정과 투지, 진솔한 이야기에 경의를 표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회자는 <80년대를 살았던 선배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투쟁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우영옥회장은 <저는 투쟁이야기를 하면 노동조합 말아먹은 것밖에 없다.(웃음)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든다는 거였다. 현장에 가서 시다부터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선배가 다른 활동가가 있는 어떤 공장을 지정하며 거기가서 노동조합을 활성화시키라고 했다. 미싱경험이 1달밖에 안됐는데 내가 들어간 곳은 신발공장미싱이었다. 그러니 미싱을 잘못한다고 계속 야단을 맞고. 그렇게 저녁만 되면 힘들었지만 사람을 만났다. 들어간지 몇달만에 회사에 산재가 발생해 사람이 죽었다. 노동자들에게 <보상받기 위해 싸워야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노래를 부르며 길거리를 다니다가 회사사람들한테 걸려 해고됐다. 야사만 이야기하는 건데. 회사앞에서 복직투쟁을 했지만 회사는 복직시키지 않았다. 너무나 괘씸해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했고, 이겼다. 그렇게 해서 집사는데 보탰다.(웃음)>고 노동현장투신시절을 회상했다. 


사회자는 <노래 하나 듣고 마무리로 피할 수 없는 키워드를 드리도록 하겠다. 선배님이 신청한 곡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다>며 마이크를 건넸다. 최민농성단원의 기타반주에 맞춰 우영옥전민동회장이 열창했고 청중도 함께 불렀다. 사회자는 <이러다가 농성장을 안올까봐 걱정된다. 선배님들의 노래를 들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라고 재미나게 말했다.



혼자만 <올F>를 받은 사연


계속해서 사회자는 <80년대 학점이야기부터 해달라.>고 마지막질문을 했다.


우영옥회장은 <학점이 잘 나올 거라 생각 안했다. 80년도에 입학해서 졸업을 84년도에 해야 하는데 97년도에 했다. 학교를 떠나면서 노동자들과 같이 평생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안됐다. 노동자들은 기술이 있는데 나는 기술이 부족하고. 결혼해서 애들을 먹여 살리고 하다가 옛날 노동운동때 생각으로 사회복지를 했다. 2학년때는 학점이 괜찮았는데, 3학년때부터 후배들 챙기느라 학점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복학했을 때 펑크난 게 많아서 3학기를 더 다녔다. 내가 사회학과인데 통계도 과목에 있더라. 통계수업을 한번인가 들어가서 시험을 도저히 치를 수 없었는데, 다른 과 운동권, 그것도 남자가 제 이름으로 들어가 시험을 쳤다. 헌데 C를 받아서, 내가 야단을 쳤다. B나 A가 나와야지 하면서.>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유영오회원은 <86년도에 갑자기 이렇게 살아야하나 하는 허무적인 생각이 들더라. 명분도 없이 그냥 중간고사를 안봤다. 그 이후에 정신을 차리고 기말고사를 보려니 건대사건이 터져서 모두가 시험을 안봤다. 그래서 중간고사까지 안본 나만 <올F>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사회자는 <<80년대는 이렇게 사랑했다.>얘기는 다음에 해달라.>며 <마지막으로 사무차장님께서 후배들에게 하고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미자사무차장은 <지난번에도 여기와서 <마음은 같이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몸이 다른 곳에 있었다. 어제도 청운동유가족들과 같이 있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08배하는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 가면서 <내가 이렇게 할 게 없구나.>라는 걸 느낀다. 그래서 잠을 잘못잤다. 오늘은 잠을 잘 잘 것 같다. 시간나는 대로 자주 오고 자주 보고 웃으며 봤으면 한다.>고 다짐했다.


이에 사회자는 <사무차장님께서는 첫 단전때 오셨다. (김영운회장을 가리키며) 피난예배때 항상 오셨고, (유영오회원을 가리키며) 전화 한통으로 달려오셨다. 선배님들이 이렇게 오셨는데 선배님들 사랑한다고 큰 하트를 만들자.>는 제의에 일제히 <하나, 둘, 셋. 선배님들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만든 <하트>와 훈훈해진 분위기속에 사회자는 <다음에는 진짜 사랑이야기를 듣도록 하겠다.>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코리아연대의 유인물은 논조가 명확했다>

사회자는 <잠깐 5분정도만 매실제조법에 대해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다. 항상 매실음료를 가지고 오시는데 큰 박수로 모시도록 하겠다.>며 <J선배님은 농성단에 오시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지고 오신다. 정희씨가 선배님의 모습을 표현한다면?>이라고 물었다.

김정희농성단원은 <등에 뭔가를 꽉꽉 채우고 양손에 가득히, 더운 날씨가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지고 오신다. 그리고 이렇게저렇게 먹으라고 일일이 설명을 해주신다. 하나하나 정성으로 포장하고 메모까지 남겨주신다.>며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자가 <어머니가 딸에게 싸주듯이 바리바리 싸주는데 김정희씨는 어떤게 기억이 나나요?>라고 묻자 김단원은 <매실이 기억이 나고요. 낙지젓도.>라고 말해 모두 크게 웃었다.

사회자는 <쉽지가 않다. 평소에 본 분도 아니고 농성전에 친분관계가 있던 것도 아니고.(웃음) 이런 마음이 어디서 샘솟는지 꼭 물어보고 싶었다. 선배님의 마음을 고백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청했다.

J씨는 <이런 것을 공개한다니 부끄럽다. 부끄러워하는 체질이 아닌데 여기 올 때마다 부끄럽다. 선배님들도 말씀하셨는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아는 분들이 얘기를 하신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동지가 우선이고 대중이 중요하다. <세월>호때 자발적으로 잘 치고 나가다가 오히려 시민사회단체를 만나면서 떨어졌다. 그때 코리아연대의 유인물을 봤다. 수많은 유인물중에서 논조가 명확했다. 여기 오면 늘 배우고 간다. 삶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하게 된다. 자루속의 송곳이라는데, 모범이라고 판단한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거듭 고맙다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자는 <마지막노래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최민단원이 준비했다.>며 별밤1부를 마무리했다. 최민농성단원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르겠다.>며 노래를 시작했고 모든 참가자들이 다 일어나 함께 불렀다. 


0331 별밤1부 전민동1.jpg


0331 별밤1부 전민동2.jpg


0331 별밤1부 전민동3.jpg


0331 별밤1부 전민동4.jpg


0331 별밤1부 전민동5.jpg


0331 별밤1부 전민동6.jpg


0331 별밤1부 전민동7.jpg

2부는 <농성팟>녹음으로 선배들과 후배들이 삶과 운동에 대해 편안히 대화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그 대화를 요약한다. 


양고은

농성단원 이미숙, 이상훈선배님들이 함께한다. 지방에서 온 샘물친구와 예쁜동생이 함께 하고 있다. 아이스크림과 함께.(웃음) 세월호문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마침 전주에서 올라 왔는데 그곳 세월호농성장이 지역농성장중 마지막까지 농성하는 곳이다.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쓴 시가 세월호농성단 사람들을 많이 울렸다고 한다. 그때 어떤 생각으로 쓰게 됐는지 듣고 싶다.


<샘물친구>

유가족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 유가족의 입장에서 시를 쓰려고 했는데 막상 유가족들이 많이 우시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데 옆사람이 <우는 것이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다.>라고 얘기해줬다. 시가 유가족의 마음에 많이 다가왔다니 제가 더 뿌듯했다.


보고픈 얼굴


점점 커가던 네가

투정부려도 

가지고 싶다는 것

다 사줄 것 그랬다.


네가 반찬투정 할 때에

먹고픈 것 

다 사줄 걸 그랬다.


네가 지친 얼굴로 

늦은 밤, 집에 들어올 때

네가 밝은 얼굴로 

나를 불러올때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고 

너를 꼬옥 안아 줄 걸 


이렇게 오래 

못볼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 사랑한다

몇번이고 말해 줄 걸

이렇게 예쁜 네가 

내게 와주어서 고맙다고

몇번이고 말해 줄 걸


보고픈 마음에

긴 밤하늘 속에 빛나는 별과

흩날리는 하얀 눈과

주륵주륵 

비 내리는 검은 하늘에

못내 흘리는 내 눈물 보거든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라 여겨주렴


아가야

춥지 않게

배고프지 않게 

따뜻한 하늘 품에 있어야 한다.


오늘도 몇번이고 몇번이고

보고 싶은 예쁜 네 얼굴

다시 보고 싶어 걷는다.


295개의 밤들과 수많은 밤들이 모여

진실이 밝아오는 그 날이 오면

너를 위해 열심히 살았노라 말하리


<샘물친구>

지금은 그때보다 (울지 않고) 잘 읽을 수 있다. 그때는 도보행진 마칠때였다. 오늘이 <세월>호350여일이라는데. <잔인한 계절>이란 노래가 있는데 4월은 잔인한 계절인 거 같다. 1년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유가족들은 여전히 농성중이고 작년엔 특별법을 위해 나왔지만 이젠 이를 지키려하고 있다. 유민아버지도 다시 단식을 결의했고, 같은 일이 반복되니 너무 안타깝다. 이런 세상이 혼란스럽고 이 나라가 유가족에게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싸우게 한다. 슬퍼할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생각하게 됐다. 학교에서 <세월>호사건 <약속지킴이>모집사업을 하는데, 모집가판대에 와서 친척중 유가족이 있다며, 또 친척이 생존자였다며 했다가도 너무 슬퍼서 같이 못하겠다고 얘기했다. <세월>호 당시 해경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엄청난 참사를 봤는데도 나서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의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해야겠다. 전주서 <세월>호농성장을 지켜가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농성장을 지켰다.


양고은

전에 샘물친구의 시를 봤다. 이 자리를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봤다. 옆에 있는 예쁜친구는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세월>호는 현재 참사라면 일본군<위안부>는 과거의 가슴아픈 역사다. 


<예쁜친구>

할머니가 시로 쓴 글을 들었는데, 일본군으로부터 그때뿐아니라 삶 전체가 고통속에 있었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유럽까지 가서 증언을 했다. 할머니가 저렇게 하시는데 가만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하게 됐다. 지칠 때마다 할머니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지낸다. 응급실에 가는 상황에서도 수요집회를 가시려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양고은

내가 사회를 보다보니, 팟캐스트 하다보니 분위기 딱딱해진다.(웃음) 여기 선배들도 어떤 계기로 활동하게 됐는지 얘기해 보기로 하자. 앞서 70~80년대 얘기를 들었다면 90년대 얘기를 들을 기회다. 


이미숙

단국대 나왔는데 캠퍼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학교다. 개나리, 진달래들이 정말 예쁘다. 옆에 저수지도 있고 좋다. 입학전에는 반공의식이 철저한 학생이었는데 학생운동하게 될 줄 몰랐다. 집이 어려워서 일을 해야겠고 학비도 벌어야 돼서 동아리활동을 못할 거라 생각했다. 입학하지마자 알바 찾으러 다녔다. 한학번윗선배가 나를 교지편집위원회로 데려가려고 그렇게 붙어다녔다. 수업끝나면 앞에 기다리고, 건물앞에서 기다렸다. 그 선배가 갑자기 불러서 끌려갔는데 갔더니 교지편집위원회 시험보는 거였다. 보수적이고 성당을 다닐 때라 답안지가 어땠겠나.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불렀는데 성가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분위기 안좋아서 떨어질 줄 알았다. 선배들이 위로해주러 <액체시대>라는 술집에 데려가서 이리저리 위로했다. 떨어졌는데 선배들이 다시 회의해서 순진하고 착하니 같이 하자고 해서 다시 붙여줬다. 

그때는 분위기가 보수적이지 않고 절반이상이 집회에 참가했다. 집회 때문에 휴강도 했다. 전대협출범식에는 한양대가 미어터질 정도로 많이 왔다. 집회에 많이 다니면서 의식이 깨었다. 결정적인 것은 세미나였는데 철학, 역사, 정치경제. 1년 선배가 가르쳤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어 논쟁도 많았다. 그러다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10년동안 거짓된 교육을 받은 분노에 논물도 흘렸다. 그뒤엔 자발적으로 활동했고 <올F>성적도 두번 있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연세대사건이다. 종합관에서 얻어터지고 끌려나온 것도 있지만 이것 때문에 학교운동도 많이 어려워졌다. 우리가 잘못한 거 없는데 언론에서 호도한 것이 억울했다. 경찰들이 끌려나오는 여학생들의 가슴을 모두 만지고 고개를 든 여학생의 머리를 깨서 피가 흘렀다. 남학생들은 더 처참했다. 연세대 일을 학우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자보 쓰면서 선전일을 하게 되고 학생회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운동하게 된 계기는 연대사건이다.


양고은

저도 집에서 대학입학할 때 데모만은 하지 말라고 하면 저는 <제가 그걸 왜 하냐>고 얘기했다. <연대사건>언론보도를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다. 언론이 폭도로 왜곡해서. 그렇게 알았다.


이미숙

연세대서 최루액을 뿌리고 사람들을 연행하고. 처음부터 연세대 갇혀 있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헬기에 몰려서 종합관으로 몰려갔다. 단전단수. 음식물을 경찰이 차단했다. 매점의 음식도 없었다. 그래도 40~50명이 있는 곳에 초코파이를 돌렸는데도 절반이상 남아서 다시 돌아오곤 했다. <5학년>때인데 당시 너무 힘들었다. 물도 안나오는 화장실바닥에 초코파이조각을 발견해서 주워먹은 기억도 난다.


양고은

그때 그럼 구속된 건가?


이미숙

제가 똑똑했던 거 같다.(웃음) 천안에서 서울 오는 기차표 보여주면서 연세대학우들이 있다고 해서 걱정돼서 올라왔다고 했다. 훈방조치됐다. 버스타고 내려오는데 냄새가 많이 났다. 알고 보니 내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웃음) 학교 왔는데 누구는 구속되고 집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암담했다. 광주나 나주 등에서 올라온 친구중에서 수배중인 사람들은 우리학교에 피신을 오기도 했다. 위치적으로 좋아서다. 그렇지만 어지러움속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았다. 같이 있었던 사람들하고 재미있게 지냈다..


박근운

97년. 연대사건이후 입학했다. 달동네에 살았다. 화장실도 없는 산비탈집. 고등학교때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별로 안했다. 주로 도서관가서 책을 많이 뒤지고 놀았는데 빠졌던 책이 명상철학이었다. 방이 2개였다. 동양철학, 불교철학도 보고 했는데 철학공부를 더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본 것이 <철학의 기초>였다, 유물론에 대해 공부하게 됐다. 라디오 듣다가 안치환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노래를 접해 민중가요테이프를 샀다. 신동엽시인도 알게 돼 책을 찾았지만 역사를 모르니 이해가 안됐다. 안치환콘서트 가려고 티켓 사려 국민문고에 들어갔는데 역사책을 샀다. 그러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집회도 나갔다. 한총련활동도 하게 됐고 활동을 지속하게 돼 와이프도 만났다.(웃음) 부모님께서 대학입학할 때 농악대 같은데 가서 데모하지 말라 하셨다. 나중에 (한총련대의원건으로) 수배 떨어질 때 편지 1장 남기고 집을 나왔다.


김혜영

저는 88년도에 중2였고 그때 광주5.18청문회를 했다. 큰언니는 대학교1학년, 그때 큰언니랑 방을 같이 썼는데 언니가 매번 음산한 노래를 틀었다. 그시대는 민중가요가 많지 않아 노찾사 같은 노래패만 들었다. 학생들 대다수가 투쟁하던 시기였다. 우리언니도 했고. 언니책상에 5.18자료집이 있었다. 난 호기심으로 자료집을 보고 중2때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평범히 고등학교 다니다가, 대학와서 5,18광주순례 간다고 크게 대자보가 붙은 걸 봤다. 선배하테 가고 싶다 해서 친한 친구랑 갔다. 5.18민주항쟁기념시기와 대동제가 한주차인데, 흥성거리는 거 반대하면서 광주진실을 밝히라고 외치기도 했다. 광주 가서 충격이었다. 그렇게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진실을 알아야겠다 생각해 운동을 시작했다.


양고은

내일도 <별밤> 해야 해서 좀 남겨둬야 한다.(웃음) 후배들이 궁금한 게 있을 것 같다. 


<샘물친구>

힘들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았나?


이미숙

저는 제일 힘들었을때가 조직사건이었다. 나도 당사자중 하나. 당시엔 사건에 엮일만큼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내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같은 학교에 질이 안좋은 선배. 소위 프락치. 그 선배가 활개치고 돌아다니는데 남은 후배들이 있었다. 석방돼 나왔는데 선배가 한 행동, 말 이상한 거 알아챘다. 후배들이 위험해지고 나와 같은 조직사건 당할 게 뻔해서 그 선배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 과정이 힘들었다. 또 학교안에 악질적인 학생회가 있어 몽둥이찜질 당한 학생들도 있다. 가둬놓고 각목으로 때리고 투표함 옮기고 깡패천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학점은 모두 F. 프락치 활개치고. 해야할 일이라 했지만 모든 걸 걸진 않았다. 두려움 하나 때문에. 일단 성공해서 실체를 폭로하고 정리를 시켰지만 그 이후에 망가진 학생회를 일으키기 위해 7년반이나 학생운동을 했다. 과거는 그랬지만 지금은 잘살고 있다.(웃음)


<예쁜동생>

저는 질문드리기 전에 사실 제가 얼마전에 집 나왔는데 그후 상황이 그리고 심적으로 힘들었다. 많이 힘들고 막상 뭐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랐다. 농성장 왔다갔다 했는데 하는 게 없으니까, 선배들 얼굴도 못보겠다. 그러다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찾아서 해야겠다 맘먹었다. 그때부터 많이 움직이고 있는데 단전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속상했다. 근데 <별밤>한다는 소식에 처음엔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다가, 다같이 헤쳐나가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았다. 선배들보고 많이 힘을 얻고 실천하게 됐다. 선배들에게 고맙다. 질문인데. 풀이 죽고 기가 꺾일 수 있는 상황에 어떻게 촛불 켜고 노래와 춤을 당당히 하는 선배들의 힘의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미숙

공부하면 된다. 그게 정답이다. <누가 시켰냐> 이런 애기도 선배들한테 많이 들었고, 사회 나와서는 언론에서는 <뭘 받았네>·<어쨌네.> 이런 얘기하는 걸 듣는다. 운동하면 알겠지만 어렵다. 포기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꿈을 접으려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처럼 버려야될 게 있다. 직업전망, 경제력. 또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게 쉬운일이 아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실력도 있어야 된다, 그거는 자기스스로 다그치면서 나올 수밖에 없다. 무언가 바꾸기 위해 지혜도 있어야 하고 능력도 있어야 한다, 노력하면서 실력이 늘 수밖에 없다. 부단히 자기를 채찍질하는 게 순탄치 않다. 단지 책상앞에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힘든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하게 하는 힘은 두가지. 하나는 그 길이 옳다는 확실한 신념. 여러가지 경험으로 신념화되는 과정이 있을 거다. 아직 어려서 가슴에 와닿진 않을 듯한데. 또다른 하나는 동지라고 말하고 싶다. 옆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있는 즐거움, 기쁨이다. 아이들을 남에게 맡기고 농성장을 지키는 여성동지들이 있다. 건강이 안좋은데도 새벽일찍 일어나고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하고 하루한끼만 먹기로 한 농성장에서 자기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해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잘 싸워서 공안한파가 여기서 끝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게 동지애다. 같이 운동을 하면 마음이 찡하게 울릴 때가 있다. 그런 경험들, 순간순간들이 쌓이면 평생동지가 된다. 한마디로, 신념과 동지라고 말하고 싶다.


박근운

선배들이 보내주는 책 읽으면서 열심히 참여하면 잘할 수 있다.(웃음)


<샘물친구>

기독교회관에서 이렇게 농성하는 분들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살아온 시대는 달랐지만 추구하는 건 같다.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자리였다. 참 고맙다.


박근운

제가 미숙누나랑 애기나눈 거는 주로 <죽을래?> 이런 얘기였다. 여태까지 들었던 얘기중 제일 길었다. 매력적인 선배동지다. 후배들도 정말 훌륭하다.


김혜영

94년도에 문익환목사님추도식을 하는데 혜화동거리에 다 모였다. 조직적으로 참여한 게 아니라 소식을 듣고 개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꽉 채웠다. 그 단상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거다. 나도 굉장히 슬펐지만 그 사람 눈도 굉장히 슬펐다. 그 장면을 남기기 위해 사진촬영을 한 사람이 바로 미숙언니였다. 집회때 항상 보는 정도 이상 몰랐다. 멋있었다. 그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의 살아온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겸손함. 언니의 그런 모습과 마음이 언니가 운동하며 살아온 힘과 바탕이 됐다고 본다. 그런 모습이 후배, 동지에게 신뢰를 줬다. 언니얘기는 항상 인상적이다.


(도중에 철야규찰을 서는 <차도녀>가 등장했다.)


양고은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친구다. <인턴스테파니> 들으세요 차도녀도.(웃음)


<차도녀>

많은 시간을 휴학하며 생각과 행동이 운동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매일밤 시간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한다. 나는 활동의 계기가 신문사인데, 부산국제영화제 가서 비상업적인 영화들 보면서. 지금까지 본 영화가 상업적인 자본주의영화라는 것, 시간을 죽이는 영화라는 걸 알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영상의 힘을 통해 나의 생각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머리에 스친 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왜 활동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거였다. <별밤>이 그래서 좋다. 선배들의 삶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별밤>은 촛불과 함께하며 분위기도 맞춰준다.(웃음) 선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추억을 쌓는 것이, 이 순간에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자리를 만들어준 것에 감사하다.


양고은

시간이 짧아 아쉽다. 철야하랴 피곤할텐데 늦은 밤 다들 수고했다.


0331 별밤2부 이미숙3.jpg


0331 별밤2부 이미숙1.jpg


0331 별밤2부 이미숙2.jpg


0331 별밤1부 후 2부시작전 양고은김혜영.jpg


별밤 웹진 수정.jpg 

* 기사제휴 : 21세기민족일보
진보노동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