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이 중요하다. 존재는 요소들의 결합이고, 그속에 배여있는 속성에 의해 운동한다. 운동의 합법칙성을 밝히려는 속성부터 알아야 한다. 존재의 본질적 속성에서 운동의 본질적 합법칙성이 나온다. 맑스는 『자본론』을 집필하면서야 속성이라는 개념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자본주의의 세포인 상품이라는 존재의 속성으로서 가치를 주목하고, 그로부터 그 운동의 합법칙성인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을 찾아냈다. 다만 이 속성의 개념을 철학적 범주로까지 심화시키진 못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아무리 파봐야 나오지 않는 속성론이 꽃을 피운 건, 이를 산수로 삼아 수학의 단계로 발전시키고 완성한 철학사상에서부터다. 철학의 근본문제·근본원리에서 완전한 혁신이 이뤄지고 새로운 철학사상이 창시·정립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사회적 속성이 밝혀지게 됐다. 사람·민중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사회적 운동의 본질적 합법칙성, 곧 그 자주적 본질과 창조적 성격, 자주적 사상의식이라는 추동력이 해명됐다. 

자주성과 창조성은 사람이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그 변화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적 속성을 말한다. 자주성·창조성을 가짐으로써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고 힘있는 존재로서 세계와 자기운명의 지배자·개조자가 된다. 사람은 자주성·창조성을 가지고 자주적 지위를 차지하고 창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이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자주적 지향을 가지고 세계를 개조하는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는 건 다 자주성·창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적 지향이란 인생의 화살표가 변혁의 방향으로, 위로 향해 있는 거라면, 창조적 능력이란 그 화살표의 속도와 관련있다. 자주성이 변혁의 주인다운 태도, 책임성이라면 창조성은 변혁을 이뤄내는 능력, 집행력과 관련있다. 자주성·책임성이 강하면 시련과 난관에 흔들리지 않고 창조성·집행력이 강하면 사업과 투쟁을 잘한다. 반대로 자주성, 책임성이 약하면 동요가 심하고 창조성·집행력이 약하면 실제 일이 안된다. 일을 잘하려면 자주성·창조성이 강해야 한다. 

자주성과 창조성을 합쳐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체성은 곧 변혁성과 같다. 이 변혁성은 다름아닌 노동계급의 변혁성이다. 쁘띠의 변혁성은 진정한 변혁성이 아니다. 쁘띠에겐 변혁성이 없다. 조직의 지도와 집단적 협력을 본성으로 하는 노동계급은 그래서 변혁적이고 주체적이며 자주적, 창조적이다. 사업과 투쟁을 자주적, 창조적으로 잘 하려면, 노동계급적이어야 한다. 쁘띠는 잠깐 잘해도 결국 끝까지 못가고, 노동계급은 잠깐 못해도 갈수록 잘한다. 노동계급만이 변혁적이고 주체적이다. 

일을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노동계급성을 연구하고 노동계급성이 몸에 배게 하라. 진실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배우고 또 배우는 자세, 일을 끝까지 책임지며 어떤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정신, 계속 혁신하고 계속 전진하며 일체의 타성과 관성을 거부하는 태도, 자력갱생하고 간고분투하며 이신작칙하는 풍모도 다 노동계급성이고 노동계급의 변혁적 기풍이다. 이 반대에 쁘띠성이 있다. 인류의 계급적 지향은 쁘띠가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이건 당위고 필연이다.


조덕원

기사제휴: 21세기민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