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목사·코리아연대 농성89일 단전 12일째인 6일, 11번째 별밤(농성장,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송무호선생과 함께 4.19항쟁, 민청학련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시작전 4.19항쟁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영상 2편을 먼저 시청했다. 영상에서 민청학련사건변호인은 <무죄임이 확실하면서도 유죄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송무호선생은 <민주화운동정신계승연대이사장, 사월혁명회회원, 평통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가협목요집회에도 가능하면 빠짐없이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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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정신은 민주주의 그리고 자주와 통일 

송무호선생은 <사실 4.19세대는 아니고 청와대옆에 있는 청운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4.19가 터져서 현장을 본 경험이 있다.>며 <4.19세대는 아니지만 4.19선배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까 많이 듣게 됐다.>고 말했다.

송선생은 <선배들의 이야기속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외세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분단된 조국에 대한 한탄, 통일을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덧붙여 <선배들을 통해 본 4.19의 정신은 민주, 자주, 통일>이라며 <아직도 자주와 통일을 못 이뤘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씀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유신독재에 대한 항거, 민청학련사건 

민청학련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당사자였던 송무호선생은 이사건에 대해 <유신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연계해서 한날한시에 터지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정보당국에 의해 공산주의세력의 조종으로 청와대를 점령해 적색정권을 세우려했다 해서 감옥에 넣었던 사건>이라며 <학생들만 가지고 꾸미기가 어려우니까 인혁당을 갖다 붙여서 우리를 적색혁명분자로 몰았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긴급조치 1호·4호를 붙여 집어넣었다.>고 설명했다.

<1974년 1월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거나 뭐하면 몽땅 잡아가던 긴급조치1호가 발표됐다.>며 당시 엄혹했던 상황을 이야기한 뒤 연세대학생이었던 송선생이 그에 반대했던 시위를 준비하던 과정을 말했다. 또 시위 당시 칼을 준비해 <목에 칼을 대고 형사들에게 가까이오면 긋겠다>고 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한준혜사회자는 <경찰이 쫙 깔려있는데 칼을 들고 나섰다는 것은 강한 의지>라며 <그 상황에서의 대담성과 의지력이 후배들에게 크게 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송선생은 <사실 나는 폼만 잡았던 가짜였는데 80년대 진짜 그런 것들을 결행한 사람들이 숱하게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객관적 평가 

한편 <민청학련해당자들이 운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하면서 <상당부분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거나 상당부분은 정치계로 진출해있거나 공기업이사장 등을 하고 있고, 정당칼라로 따지면 새정연정도 되는 사람들로 변했기 때문에 민청학련모임 있으면 개인적으로 별로 나가고 싶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운동판에 늦게 입문해서 몰랐는데 현재 진보운동진영에 60대가 공백이라며 민청학련세대 내지 민청련세대가 운동선상에서 떠나고 정치로 많이 갔다.>고 꼬집었다. 

송무호선생은 <민청학련사건으로 인해 사형, 무기징역 등 요란하게 선고됐는데 11개월반만에 다 나왔다.>며 <고생은 별로 안하고 싸게 치르고 이름은 떠들썩해 유명인사가 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어 <운동사적인 측면에서는 민청학련이 의미있고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건이나 실질적으로는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며 <실제로 (열심히 투쟁한) 사람은 따로 있고 그런 게 우리 인생사에는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유린당하는 이 상황에서는 약간의 견해차이에 상관없이 범민주세력이면 다함께 뭉쳐야 한다.>며 <민청학련당사자들이 범민주세력의 주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시대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도록 민청학련모임에도 당분간 열심히 참여하려 한다.>고 전했다.

고이희영선생이 맺어준 코리아연대와 송무호선생의 인연

계속해서 사회자는 같은 지역에서 인연을 맺고 활동하고 있는 이미숙농성단원에게 송선생에 대한 마음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미숙농성단원은 <선생님을 뵌 것은 얼마 안됐는데 사실 이희영선생님께서 맺어준 인연>이라며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제일 어려울 때 어떻게 하는지 그 사람의 진가가 그때 드러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시기에 함께 있어서 감사하다.>며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바라는 것도 잘 듣고 잘 투쟁하고 진심을 다해서 운동하고 농성도 승리적으로 결속하면서 그렇게 보답해드려야겠다.>고 말했다.

코리아연대에 대해 송선생은 <굳세고 확실하고 원칙에 맞게 하려하고 당차고 대단하고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을 보면서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제가 한단체에 두번 와보고, 세번 와보고, 네번 와본 단체가 없다.>고 애정을 전했다. 또 <자기코가 석자인데 (416가족동조삭발) 머리를 깍고, 불 꺼지면 그냥 좀 쉬지 <별밤>을 한다.>며 <애정은 있는데 사실은 좀 버겁다.>고 말해 복도는 웃음바다가 됐다.   

송선생과 함께 한 1부<별밤>은 송선생의 노래 <해방가>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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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스테파니>의 <훈샘>과 함께 한 <별밤>토크

<별밤>2부는 농성단의 부단장이자 팟캐스트 <인턴스테파니>에 출연중인 <훈샘>, 이상훈부단장과 함께 했다.

이상훈부단장은 교육열이 높은 마산출신으로 지독하게 입시공부를 해 3수끝에 연세대에 들어갔던 이야기로 학생시절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시지옥에 매몰됐던 해방감으로 1학년 데모라는 것도 나가보고 투쟁전선에 많이 섰던 학생으로 주로 마스크 쓰고 쇠파이프 들거나 몸으로 전경들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또 3학년이 돼서는 학교를 대표해 투쟁국을 진두지휘했다고 말했다. 

잊을 수 없는 1996년 3월과 8월

이상훈부단장은 <1996년은 저뿐만 아니라 연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은 잊지 못할 한해였다.>며 평생운동의 계기가 됐던 1996년 3월과 8월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이부단장은 1996년 김영삼정권당시 <대선자금공개, 교육재정확보>를 구호로 들고 격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전하며 <3월29일이 집회때 한학우가 곤봉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그게 노수석열사였다.>고 회상했다. 연세대사수대였던 <한열대>의 구성원이었던 후배 노수석의 죽음에 대해 꺼내며 <3월29일 이후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4~5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투쟁했던 기억이 난다. 96년 3월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상반기를 보내고 8.15통일대축전을 연대에서 준비했는데 김영삼정권이 학생운동을 파쇼적으로 탄압했던 이른바 <연대항쟁>이 일어났다.>며 당시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고향에 내려가게 됐던 일과 당시 학생운동의 좌경노선에 대한 평가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96, 97년 투쟁과정에서 시대에 빚을 졌다.>며 <제위치에서 한두번이상 구속됐어야 하는데 그것을 피해갔다. 저에게 괴로운 길이고 가슴 아픈 일>이라고 밝혔다.

운동주체들의 자기혁신을 뼈져리게 느꼈던 진보정당활동

계속해서 이상훈부단장의 사회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2003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보정치활동을 해온 이상훈부단장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이 분열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에 들어가보니까 정파갈등이 심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주로 통합을 내세우고 다수의 횡포에 반대하는 입장을 많이 냈다.>며 경선을 하면 당이 깨질 것 같아 경선에서 양보한 사연도 설명했다. 학생운동시절의 엔엘(자주계열)과 피디(평등계열)의 대립에 대해서도 덧붙이며 <90년대 엔엘과 피디가 함께 힘을 합쳐서 학생운동 이끌어 나갔다면 새로운 사회가 왔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이상훈부단장은 <진보정당운동에서도 운동주체들의 자기혁신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를 뼈져리게 느꼈다.>고 전했다.

끝으로 기독교회관 농성투쟁에 대해서 이부단장은 <이적목사님과의 만남이 특별했고 소중했다.>고 밝히고 <이곳에서 만난 목사님 한분한분에게 많은 감동을 느꼈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농성하는 동지들의 헌신과 분투, 밖에 있는 동지들의 안받침이 있어 우리는 승리하는 농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훈농성단원의 학생운동과 정당활동 이야기를 들으며 <별밤>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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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제휴 : 21세기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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