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TT(튀니지노동조합연맹)
프랑스식민지시절 프랑스노총 CGT(노동총연맹)의 영향을 받아 1946년 창립된 UGTT는 온건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현재 조합원수는 51만7000명이며 ITUC(국제노동조합총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1956년부터 1970년대까지 UGTT지도부는 집권여당인 네오데스투어(Neo Destour)당과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부르기바정부가 추진한 1958년 교육·보건정책, 1964년 산업화정책은 UGTT의 1955년강령에서 나왔고 UGTT사무총장 출신의 장관들이 입안한 것이었다.
UGTT는 벤 알리 대통령의 집권초기 정치개혁을 지지했다. 벤 알리정부에 참여하면서 노조내부에 위기가 닥친 적도 있지만 튀니지혁명직전 지도부가 반정부적 입장으로 바뀌면서 UGTT는 혁명과정에서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2013년 2월6일 야당지도자 초크리 벨라이드의 암살직후 UGTT는 암살에 저항하는 총파업을 조직했다. 특히 우편·통신·보건·교육 부문에서 활발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혁명에서 UGTT의 역할
조합원들 사이에서 벤 알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젊은이들의 정치적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권에 우호적이던 UGTT지도부입장이 바뀐다. 이후 UGTT를 중심으로 단결한 노동운동세력은 민중봉기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친다.
2011년 1월14일 벤 알리 정권붕괴후 임시정부구성당시 UGTT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참여했다. 애초 UGTT는 집권여당인 RCD(민주헌법회의)에서 탈당한 모하메드 간노우치가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임시정부에서 나온 뒤 민주헌법회의해체와 장관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벤 알리 우호세력은 모든 야당세력과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임시내각을 구성했으나, UGTT는 임시내각에 파견했던 노동자대표자를 사퇴시키고 UGTT소속 국회의원들 또한 사퇴했다. 이어 구여당세력의 척결을 요구하는 시위와 함께 1월 26일~28일 튀니지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스팍스에서 총파업을 벌였다.
혁명과정에서 대중투쟁의 단일집중행동을 이끌 진보세력통합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노조가 전선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며 우선 노조의 조직적지지 결정을 기다리자는 의견과 일단 진보세력이 결집하고 차후 노조와의 관계를 발전시키자는 의견이 있었고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로 2012년 8월 ‘혁명대의실현을위한인민전선(인민전선)’이 발족했다. 인민전선은 같은해 9월 전국대회를 열어 강령을 채택하고 노동자당의 함마미를 대표로 선출했다.
혁명, 그리고
폭압적인 독재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분노는 UGTT의 계급투쟁과 결합해 노동자, 청년학생, 여성의 광범위한 투쟁으로 분출됐으나 정치적 대안을 조직하는데 실패하며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튀니지혁명의 주요원인중 하나였던 경제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태다. 2012년 튀니지의 총실업률은 19%, 청년층의 실업률은 42%에 달했다. 친제국주의독재 벤 알리 정권은 친자본주의·온건이슬람주의 엔나흐다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제헌의회가 구성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헌법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UGTT는 △비정규직노동조건개선을 위한 법안 마련 △생활물가인상에 기초한 실질임금인상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노동자권리증진에 따른 투쟁을 전개해 나갈 전망이다. 5월1일 메이데이를 맞아 이런 운동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총파업을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진보세력이 어떤 정치·경제·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하다.
‘아랍의 봄’의 신호탄이었던 튀니지혁명 발발 2년이 지난 시점, 정당과 노조의 힘있는 단결을 통한 혁명의 진전이 필요한 때다.
성우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