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2.15, 음력1.10 오늘은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정확히 2주갑 120주년이 되는데, 우리는 조선이 자주권을 유지하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기회를 놓친 가장 안타까운 사건으로서 갑오농민전쟁을 주목하게 된다. 전남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전봉준 등이 사발통문을 돌려 준비를 한 후 음력1월에 봉기하자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했다. 허나 새로 임명된 이용태안핵사가 봉기한 농민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자 전봉준은 음력3월에 새롭게 봉기하게 되고 음력4월에는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음력7월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회담한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12개항폐정을 개혁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허나 음력8월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갑오개혁마저 흐지부지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지않을 수 없었다. 우선 남접의 김개남이 음력8월 남원에서 재봉기를 결의하고 이어 전봉준도 음력9월 재봉기를 결심하자 최시형의 북접도 결국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규모는 1차전쟁때보다 훨씬 확대됐으나 화력과 전투력에서 관군·일본군에 밀린 전봉준의 농민군은 안타깝게도 음력11월 우금치고개에서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김개남부대도 청주에서 패배했다.
수만에 이르는 농민군이 200여명의 일본군, 2500여명의 관군을 이기지못한 이유는 무엇보다 무장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대포·연발총·장사거리소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정예군을 당하기에는 농민군의 칼·활·죽창·재래식화승총은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우금치에서의 패배는 농민군이 든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가 꺾이고 일제의 무력간섭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오농민전쟁에서 희생된 농민군은 20~4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살아남은 농민군은 1895을미사변이후 각지의 의병들과 항일운동으로 합류했다.
만약 1884갑신정변이라는 신흥사대부들의 급진적인 부르주아개혁운동이 1894갑오농민전쟁과 힘을 합쳤으면 어땠을까. 우리민족내의 계급적인 차이를 뒤로 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우선 단결하고 함께 투쟁했다면 조선의 역사와 근대화가 전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신흥사대부들은 외세일본이 아니라 동족농민을 믿고 의지했어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치 지구저편의 비슷한 시기인 1871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꼬뮌의 도시노동계급이 그 주변농촌의 농민들과 손을 잡지못해 비참한 패배를 당했던 역사적 사실과 유사하다. 격동하는 극동의 정세속에서 우리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공조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역사적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덕원
*기사제휴 : 21세기민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