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천 총장님께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저같은 사람이 서울대 총장님 성함이나 알고 살았겠습니까. '이런 일'이라 함은 희망버스를 탔다고 김세균 교수님께서 명예교수직이 임명보류된 일을 이릅니다. 저는 이렇게 상식과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아직도 봉건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주에서 자본으로 이름을 바꾼 채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회사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같이 공장에서 잔뼈가 굵고 거리에서 철이 든 노동자들은 김세균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계시니 서울대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의 전당으로 어울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을 키우고 그 지성들이 보고 배울 학문의 전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건 비단 저 뿐만은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사춘기를 40여년 전에 지났음에도 저는 웃자라고 있는 건지 아직도 질풍노도의 풍파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김세균 교수님 이야기를 이제야 들었습니다 309일 동안 스스로를 유폐했던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입원 치료를 두달 이상 받아야 했고, 이어지던 검찰소환, 재판, 그리고 보고 싶었던 분들을 만나러 다녔던 1년여의 시간들.그리고 한진중공업의 노사합의 위반으로 또다시 노동자의 죽음. 그 원한 맺힌 노동자의 장례를 치르는 데만 66일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저에게 다시 발부된 체포영장과 경찰조사, 보강조사, 구속영장 청구, 영장실질 심사, 기각, 다시 보강조사, 구속영장재청구, 다시 기각. 이후로도 저의 신변은 제 소관이 아닌 채로 안개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김세균 교수님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에야 알게 됐습니다. 85크레인에 있던 저를 살리겠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번을 달려오셨던 김세균 교수님의 그 순정과 뜨거운 마음에 비하면 저의 게으름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가 크레인에 오른지 158일 만에 처음 희망버스가 왔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그저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했습니다. 그 85크레인은 저의 20년지기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을 매달려있다 목숨을 끊은 곳이고,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곽재규라는 순하디 순한 노동자가 47년 한많은 생애를 던졌던 4도크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곳입니다. 김주익 지회장의 시신이 누워있던 85크레인 위엔 삶의 기운보단 죽음의 기운이 훨씬 강했고, 땅보다는 하늘이 훨씬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뼘 한뼘 하늘에 더 가까워질 무렵 희망버스가 왔습니다. 그 버스에 김세균 교수님이 타셨다는 건 뒤늦게야 들었고 희망버스가 다녀가면서야 멈춰선 채 녹슬어가던 크레인에 비로소 작은 희망의 싹이 자라는 게 보였습니다. 주말의 휴식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왕복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그것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비용까지 감당해가며 화장실도 마땅히 없는 길거리에서 절망버스라는 비난까지 감수해가며 연대했던 그분들이야말로 저는 이 사회 진정한 지성인들이라고 믿습니다. 탱크의 편이 아니라, 탱크 앞에 맨몸으로 서있는 자와 연대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탱크의 힘이 아니라 지성과 상식의 힘으로 굴러가게 될 것입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통근버스를 타고 똑같은 길을 따라 똑같은 공장에 출근해서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다 다시 똑같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십년 넘게 거듭하는 노동자들은 사실 세상이 누구의 편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미처 깨달을 여지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름과 사번이 찍힌 해고통지서를 받아드는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순진하게 믿게 되지요. 내가 억울하니 내 얘기를 누군가는 들어줄 것이다. 내가 당한 일이 말도 안 되니 시간이 지나면 바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언론도, 정치도, 법도, 심지어는 정부내 유일하게 노동자들을 위한 부처인 노동부마저 자신들의 편이 아님을 알게 되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포기하거나 계속 싸우거나. 저는 후자의 경우였고 그렇게 28년이 흘렀네요. 해고된 노동자들이 가장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건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집에서 밥먹고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는 일. 그러나 그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장 멀고 험난한 게 현재 해고노동자들의 삶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세상 아무도 내편이 없다는 절망감. 세상에 그보다 큰 절망이 또 있을까요. 서울대, 누구의 대학인가요 그렇게 저와 우리 조합원들이 절망과 외로움에 지쳐갈 때 희망버스가 왔습니다. 그 절망에 따뜻이 내밀어주는 손길들에 의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 믿게 되고 그 믿음들이 부정과 온갖 부조리 속에서도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두사람의 생목숨을 던져 맺어진 노사합의조차도 어기는 자본. 그걸 지키라고 싸우고 그렇게 맺어진 합의를 또다시 어겨 또다시 노동자가 죽고. 누군가의 죽음의 댓가로 인해 나머지 사람들은 죄책감을 평생 지닌 채 불안하게나마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런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장님. 책상의 이론이 아니라 학자의 양심에 따라 약자들과 연대하고 그 신념을 올곧게 지켜오셨던 김세균 교수님에 대한 명예교수직 박탈은 부당합니다. 김세균 교수님은 서울대 교수님이기도 하시지만 힘이 없어 쫓겨나고 억울하게 속울음을 울며 가슴이 멍들어가던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몸으로 가르치셨던 진정한 스승이셨습니다. 따라서 서울대가 끝내 김세균 교수님의 명예교수직을 박탈한다면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로 남겨질 것이고 서울대에는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서울대가 누구의 대학인지 헤아려 주십시오. 평생 부당한 일에 앞장 서 오셨던 김세균 교수님께서 부당한 일을 겪으시지 않길 간곡한 마음으로 빕니다.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 올림
출처 : 오마이뉴스 |
한진중공업투쟁 관련 ‘희망버스’에 탑승했다는 이유로 서울대측이 지난 2월28일 정년퇴임한 김세균전교수(코리아국제포럼공동대표)를 서울대명예교수직에 임명하지 않고 보류한데 대해 민주노총부산지역본부 김진숙지도위원이 공개편지를 통해 항의했다.
김지도위원은 16일 서울대 오연천총장앞으로 보낸 편지글을 오마이뉴스에 게재해 김전교수에 대한 명예교수직임명보류가 부당하다고 밝혔다.
김지도위원은 편지에서 ‘아직도 봉건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주에서 자본으로 이름을 바꾼채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회사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최고의 지성을 키우고 그지성들이 보고 배울 학문의 전당에서 이런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건 비단 저뿐만은 아니리라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제가 크레인에 오른지 158일만에 처음 희망버스가 왔다, 그전까지 저는 그저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했다’며 ‘주말의 휴식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왕복 열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그것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비용까지 감당해가며 화장실도 마땅히 없는 길거리에서 절망버스라는 비난까지 감수해가며 연대했던 그분들이야말로 저는 이사회 진정한 지성인들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책상의 이론이 아니라 학자의 양심에 따라 약자들과 연대하고 그신념을 올곧게 지켜오셨던 김세균교수님에 대한 명예교수직박탈은 부당’하다며 ‘서울대교수님이기도 하시지만 힘이 없어 쫓겨나고 억울하게 속울음을 울며 가슴이 멍들어가던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몸으로 가르치셨던 진정한 스승’이라고 강조했다.
김지도위원은 ‘서울대가 끝내 김세균교수님의 명예교수직을 박탈한다면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로 남겨질 것이고 서울대에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며 ‘서울대가 누구의 대학인지 헤아려달라, 평생 부당한 일에 앞장 서 오셨던 김세균교수님께서 부당한 일을 겪으시지 않길 간곡한 마음으로 빈다’고 편지를 마무리했다.
한편 김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문제와 관련 자신이 걸어온 겹쌓인 난관에 대해 ‘309일동안 스스로를 유폐했던 85호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입원치료를 두달이상 받아야 했고, 이어지던 검찰소환, 재판, 그리고 보고 싶었던 분들을 만나러 다녔던 1년여의 시간들. 그리고 한진중공업의 노사합의위반으로 또다시 노동자의 죽음. 그 원한 맺힌 노동자의 장례를 치르는 데만 66일이 걸렸고 그과정에서 저에게 다시 발부된 체포영장과 경찰조사, 보강조사, 구속영장 청구, 영장실질 심사, 기각, 다시 보강조사, 구속영장재청구, 다시 기각. 이후로도 저의 신변은 제 소관이 아닌 채로 안개속에 놓여있다’고 소회했다.
아래는 편지전문이다.
나영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