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8월총파업➁ 총파업 승리와 좌절의 경험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정치총파업 – 원산총파업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원산 인근 문평리에 있던 ‘라이징선(Rising Sun)’이라는 영국 석유회사의 일본인 현장감독이 조선인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됐다.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인 감독파면과 처우개선 조건들을 쟁취하고 3개월을 보류하는 조건에서 합의가 되었으나, 사측은 시간을 끌다 노조탄압책동을 자행했다.
이에 문평석유회사 노동자들은 1월14일을 기해 전면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원산총파업은 1929년 1월부터 2000여 노동자가 80여일간 파업으로 8시간노동제실시, 단체계약확립, 임금인상 등의 요구를 걸고 전개됐다.
1월말, 원산노련의 지침하에 지역산하노조가 동정파업에 돌입하면서 총파업투쟁은 단사와 지역현안을 넘어 전국적인 주요 이슈로 확산됐고 전국적·국제적 연대행동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일제하 노동자·민중의 민족해방,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원산노동자들의 투쟁에 커다란 타격을 입고 조직적침탈을 강화하여 파업파괴공작으로 지도부검거, 회유책동, 파업깨기꾼(용역깡패)동원으로 내부분열을 조장하고 투쟁력을 붕괴시켰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로 식민지배하에서 한 개 도시를 마비상태에 빠뜨렸던 원산총파업은 4월초 일본경찰력에 의해 진압되면서 막을 내렸다.
주목할 것은, 원산총파업을 지지엄호하는 각지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이 식량, 신탄, 파업기금조직, 동정파업을 벌이며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국내의 외국노동자들, 해외 노동조합 등에서도 파업지지 연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강력한 연대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또 시대적 한계적인 측면이나, 총파업투쟁을 확대발전시켜나갈 주체역량이 마련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와 자본가의 총력공세에 전국적 차원에서 조직적, 정치적 대응을 펼쳐내지 못했다.
최초의 산별노조 전평 - 1946년 9월, 전국 총파업을 조직하다
남코리아는 해방이후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분단의 그늘이 드리워지며 친미자본가정권이냐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자주적 통일국가수립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1945년 11월 역사상 첫 산별조직에 기초한 전평이 결성됐다. 전평은 16개 산별조직, 주요지역에 지부, 공장에 분회를 두었고 출범당시 21만명에서 1946년 5월, 60만에 이르는 조직으로 확대강화됐다.
이에 ‘점령자’ 미군정은 1946년 7월, “정치운동을 하는 단체나 그 연합은 노조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전평을 부인했고 대한노총을 육성하기 시작한다. 미군정은 전평의 핵심산별조직인 철도노조파괴에 나서며 8월20일, 미군정운수부가 철도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했다.
이에 철도국 서울공장노동자들의 노동자대회를 시작으로 9월23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명이 일급제반대, 임금인상, 해고감원절대반대, 급식제를 종전대로 실시,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24일에는 서울철도노동자 1만4949명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전국의 4만여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은 직종을 넘어 확산됐다. 25일, 조선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했다. 26일에는 경전(京電)이 파업에 동참했다. 총파업에 대한 통일적 지휘를 위해 16개 산업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고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삼척, 마산, 군산 등 산업중심지역에 지역별 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남조선총파업투위는 “쌀을 달라,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검거투옥중인 민주주의운동가 석방과 지명수배 및 체포 철회” 등 8개요구를 내걸었다.
철도노조의 투쟁은 10월초까지 전평산하 각산별노조로 확대되어 철도, 전신, 전화, 해운, 교통, 운수, 신문, 기타 산업이 10여일 동안 멈췄다. 투쟁은 17개 산업노조, 24만여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20여일 동안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무장경찰, 대한노총, 극우청년단체를 동원해 철도노조 2명 사살, 간부 16명과 조합원 1200여명이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비록 미군정의 탄압으로 9월총파업은 막을 내렸지만, 투쟁은 3.1운동이후 최대의 민중항쟁인 10월 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노동법개악에 맞선 96-97 총파업투쟁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들은 지역적, 전국적 연대로 단결하기 시작했고, 그 성과로 1990년 전노협이 결성된다. 이어 1993년에는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이 주축이 되어 1048개 노동조합, 42만409명 조합원이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한다. 전노대는 출범과 함께 노동법개정투쟁을 이어나갔다. 노동법개정투쟁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990년대 신자유주의에 맞선 핵심투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김영삼정권은 신자유주의세계화를 남코리아사회에 도입시켰다. TV에선 ‘세계속에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라는 광고가 유행했고 자본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규제완화와 기술고도화를 통한 이윤축적을 꽤하였다. 김영삼정권은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노동법개정을 반대했고 근로기준 및 계약관계를 악화시킬 근로자파견법, 공공부문노사관계법, 기업규제완화특별조치법 등은 추진했다.
1996년 12월26일 새벽6시, 신한국당국회의원 154명은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등 11개법안을 단 6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통과된 노동법은 교사와 공무원의 단결권 부정, 복수노조 전면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해고노동자의 조합원 자격부정, 쟁의기간 대체근로허용, 제3자 개입금지존속, 사업장 쟁의행위금지, 공익사업장 직권중재지속, 쟁의기간 임금지급금지, 정리해고도입, 변형근로제도입 등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조항이었다.
이미 민주노총은 12월20일 대표자회의에서 노동법개악안을 연내강행처리 시도할 경우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고 파업투쟁에 대비해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민주노총집행부는 즉각적으로 명동성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국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금속, 대학, 자동차, 전문, 화학, 현총련 등 6개 조직 88개 노조 14만명이 아침 8시부터 총파업에 들어간데 이어 12월27일에는 병원노련 8개노조 1만3000명 등 40개노조에서 4만여명이 추가로 파업에 합류했다.
12월28일,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에 가세하여 모두 171개노조 22만여명이 파업대오를 이루고 12월29일은 부산지하철노조가 파업에 합류한데 이어 종교계, 학계, 변호사, 등 각계각층 지지가 이어졌다.
96-97 총파업투쟁과정에서 전체 누계 3422개 노조 388만명이 파업투쟁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사상최대 규모의 총파업투쟁으로 노동법을 재개정토록 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민주노총 96-97 총파업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생존권과 노동기본권, 민주주의쟁취 정치투쟁이었다. 또한 총자본의 세계화, 신보수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은 사업보고서에서 총파업투쟁의 의의로 △날치기노동법저지 △법개정‧구속철회 △조직력 확대‧강화 △산별노조건설 토대구축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강화 △조합원 정치의식강화 △노동자를 민주주의 투사로 각인시켜 정치세력화 토대 만듦 △노동자총파업투쟁이 범국민적 투쟁을 선도하고 투쟁의 확산을 가져옴 △강‧온 겸비한 투쟁전술과 다양한 투쟁형태의 개발과 전술에 있어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투쟁 승리를 위해 1조합원 1교육, 1노조1실천지침, 단위노조-연맹-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총회-대의원대회과정과 대표자회의를 통해 총파업준비를 철저히 했다. 또 의결기구를 넘어 ‘전노대에서 11/15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천명하면 00노조는 이에 따른다’고 결정하고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대중적으로 결의하고 확인했다.
시민사회, 정치권에 대한 사업도 활발히 전개했다. 여야정당 지구당 농성 및 전경련항의투쟁 등 정치적 대응과 공세, 범국민대책위(지역공대위) 구성과 범국민 캠페인 및 노동법개정촉구집회 전개, 지역본부 차원에서 ‘올바른 노동법개정을 위한 유권자서명운동’ 실시, 투쟁과정에서 대국민선전물 390만부가 제작·배포됐다.
덧붙여 대정부교섭의 전략전술이 바로 세워졌다. 노동법개정은 반드시 노동법개정투쟁이라는 대중투쟁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노개위참여를 대중투쟁에 유효한 공간이 될 수 있느냐는 판단에 따름으로서 기본적으로 대중투쟁을 준비하면서 노개위 참여와 불참을 명확히 했다.
한편, 개악저지의 핵심법안이었던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법은 노개투총파업을 통해서는 일차적으로 막아냈지만 김대중 정권하에서 이 조항에 합의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는 세계적 추세와 정권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한 근본적 인식과 운동전망이 분명하지 못했던 당시 노동운동의 한계적 측면이기도 하다.
2012년 현재, 민주노조운동은 내부적으로 △정파패권주의 △사업구조와 집행의 관료화, 중층화 △노조조직율 10%도 안되는 정규직노조중심의 노동운동과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광풍속에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연대저하와 고용위기증폭 △노동악법을 통한 노동탄압 등 이중삼중의 난관에 봉착해 있다. 더욱이 수세적 투쟁이 지속되어 자신감 또한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남코리아노동계급은 자본과 정권의 그 어떤 폭압속에서도 생산과 사회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자기임무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노동계급은 한층 강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수탈에 맞서 최선두에서 투쟁하며 대내외적 어려움을 딛고 민주노조운동의 새지평을 열어내고자 굴함없이 투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노동계급 총파업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전국적, 조직적 투쟁역량의 강화와 연대투쟁전선의 구축, 운동발전 전망속에 준비된 총파업투쟁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민주노총이 8월총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바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구철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