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가 대중의 폭발적 참여 이끌어내
혁명초반에는 주로 가난한 도시의 노동자와 실업자가 참여했으나 곧 학생, 법률가, 교수, 의사, 예술가, 주부, 상인, 블로거, 해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놀라운 속도로 하나의 저항운동으로 결집했다. 내륙지방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시위가 진행됐으나 같은 기간 해안지역대도시 주민들의 시위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초기에 단일한 노동운동지도부는 없었지만 UGTT의 진보활동가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노력했다. UGTT는 대중의 폭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고 2011년 1월초 진보활동가들의 요구에 따라 UGTT는 지역노조들이 총파업을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정부는 사회적 항의에 직면해 몇 가지 양보와 약속을 내놓았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가 강력하게 억압하자 이에 시위는 더욱 강화되면서 ‘정부억압심화와 시위의 급진화’가 형성되었다. 시위의 목표는 '벤 알리 일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되었고 시위는 전국화됐다.
온라인을 통한 조직화, 토론을 통한 의식화, 보편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단결
튀니지혁명과 관련해 세가지 주목 할 특징이 있다. 첫째, 온라인을 통한 운동네트워크 조직화다. 노조나 시위지도세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조직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의 힘이 컸다. 시위대의 운동을 창출하고 전략적으로 이를 추동하는 중심역할을 했다. 시위참여자 스스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디오, 사진, 인터뷰를 유포하고 다음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
둘째, 튀니지민중들 스스로 토론을 통해 의식화되며 전략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튀니스, 카프사, 수스, 시드부지드 등 주요도시의 거리에서 광범위한 대중토론이 벌어졌다. 시위참여자들은 과거 벤 알리 정권치하에서 경험했던 권리침해와 부패에 대해 토로하는것을 넘어 정세분석과 운동노선을 제안하고 토론했다. 과거 정부의 통치도구로 전락했던 기관들이 변화했고 UGTT도 그 대표적인 경우다.
UGTT는 1980년대 후반이후 벤 알리 정권을 지지했으나 튀니지혁명 발발이후 완전히 입장을 바꿨다. 우체국·통신 부문 노동자와 초등학교교사를 시발로 수많은 지역지부가 기층차원의 토론을 조직했다. UGTT조합원 51만7000명중 초·중등교사가 10만 명에 달한다.
셋째, 인상적인 여성의 시위 참여가 이루어졌다. 모든 시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진했으며 이들은 ‘이슬람’이 아니라 ‘시민권’을 요구했다. 즉, 보편적 요구를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었다.
한편 국제연합 인권팀 자료에 따르면 튀니지혁명과정에서 2011년 2월1일까지 총 219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 72명은 형무소에서 발생한 폭동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는 치열한 시위과정을 보여주며 정부의 폭력적 억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참고로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 남코리아정부가 인정한 사망자는 154명, 행방불명자 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