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민중주체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 잡을 주체가 없다.
제2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
- 강희남의장의 유서 -
<흰돌 강희남의장 5주기 추도식>이 5일 오전11시 경기도 마석모란공원묘지에서 흰돌강희남기념사업회와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주최로 열렸다.
5주기추도식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련방통추(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 사월혁명회, 민족화합운동연합, 전북민주동우회, 추모연대 등 통일애국인사들과 코리아연대회원 등 50여명이 참여했다.
먼저 코리아연대 이상준공동대표가 참석자를 대표해 제를 올렸다.
이어 강희남의장의 약력이 소개된 후 추도사가 이어졌다.
범민련남측본부 김규철의장직무대행은 <남북관계는 박근혜의 악랄한 민족대결책동으로 전면파탄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또다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전쟁전세가 조성되고 있고, 특히 유신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이 무참히 유린되고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통일애국활동이 <종북>으로 몰려 가혹하게 탄압당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어 <민족을 등지고 사대매국과 동족대결, 폭정을 일삼는 살인마 박근혜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장님께서 죽음으로 호소한 뜻을 이어 전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박근혜독재정권의 파쇼통치를 끝장내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투쟁에 힘차게 나설 것>을 다짐했다.
한국진보연대 전창일상임고문은 <전주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강희남목사가 설교중에 박정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베트남에서 반제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는 호지민선생을 찬양해서 박정희독재정권에 의해 전주감옥에 들어오셨다.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1970년대 박정희유신독재체제하에서 강희남의장의 삶과 투쟁을 회고했다.
이어 <범민련결성준비위원회 조직위원으로 있을 때 옥중투쟁중이던 문익환목사를 대신해 강희남목사를 의장권한대행으로 강력추천했고, 통일운동과정에서 범민련이 결성됐고 강희남목사가 초대의장이 됐다.>며 범민련결성과정을 설명하고, <이 나라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식민통치한 일본제국주의와 남북을 분단시키고 우리민족을 분열시킨 미제국주의를 빨리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분단된 남측에서 민주정권을 빨리 수립하고 남과북이 빨리 하나되는 통일을 성취하라는 애절한 외침이 강희남목사의 외침>이라고 강조했다.
련방통추 김수남선생은 <강희남의장님은 평생토록 첫째도 양키추방이요 둘째도 양키추방이요, 이 나라는 연방제자주통일 아니고는 통일방안이 없다고 했다. 범민련남측본부의 경우 저놈들이 쑥대밭을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이 나라의 통일운동의 중심체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통일할 수 없고 식민지를 청산할 수 없다. 앞으로 투쟁하는 길만이 강희남의장님을 위하는 길이다. 젊은이들이 앞으로 양키추방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루는데 앞장서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리아연대 이상준공동대표는 <정세는 전민중이 떨쳐 일어서는 <제2의 6월항쟁>이 임박한 역동적인 국면이건만, 우리가 당당하게 실천하면 할수록 만만치않은 시련을 겪게 되는 오늘, 그 어느때보다도 의장님이 그립고 그 빈자리가 커보인다.>면서 <우리는 오직 항쟁의 길,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의 길을 개척하시며 그 길에서 한치의 타협과 양보도 용납하지 않으셨던 강희남의장님의 원칙적이고 철저한 삶을 되돌아본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강희남의장님은 마지막순간까지도 전민중에게 <제2의 6월항쟁>을 호소하셨고 민중만이 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절절한 호소와 당당한 외침은 마침내 2014년 6월에 이르러, <박근혜정권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의 바다>, <촛불항쟁>으로 승화되고 있다.>며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후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강희남의장님, 박창균대표님 두분의 뜻을 따라, 오직 <강희남정신>으로 살고, <항쟁정신>으로 살겠다. 언제나 투쟁의 선봉이 될 것이며 끝내 승리의 그날을 안아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6일 전주에서 진행될 5주기추도식으로 인해 이날 추도식에는 고강희남의장유족들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참석하신 분들께 고맙다>는 유족인사를 코리아연대를 통해 전했다.
이어 공주대학교 노래패 <타는 목마름으로>는 노래 <남김없는 사랑>을 부르며 강희남의장을 추모했다.
끝으로 참석자들은 영정에 헌화하고 강희남의장님의 유골이 모셔진 유골함앞에서 참배하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다음은 코리아연대 이상준공동대표의 추모사와 강희남의장의 약력이다.
<강희남정신>으로 <제2의 6월항쟁>을 일으키자
의장님! 강희남의장님,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곁을 떠난 의장님을 추모해온지도 어느덧 5년째에 접어듭니다. 정세는 한마디로 전민중이 떨쳐 일어서는 <제2의 6월항쟁>이 임박한 역동적인 국면이건만, 우리가 당당하게 실천하면 할수록 만만치않은 시련을 겪게 되는 오늘, 그 어느때보다도 의장님이 그립고 그 빈자리가 커보입니다.
우리는 항쟁의 달, 6월 앞에 다시 섰습니다. 코리아연대는 <강희남정신>이 바로 <항쟁정신>이라는 관점으로 투쟁해 왔고 항쟁만이 이땅에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실천해왔습니다. 우리는 오직 항쟁의 길,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의 길을 개척하시며 그 길에서 한치의 타협과 양보도 용납하지 않으셨던 강희남의장님의 원칙적이고 철저한 삶을 되돌아봅니다. 우리 코리아연대가 온갖 난관을 뚫고 전진해온 힘의 원천에는 바로 이 <강희남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살겠다며 이 자리를 찾았습니다.
강희남의장님은 마지막순간까지도 전민중에게 <제2의 6월항쟁>을 호소하셨고 민중만이 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절절한 호소와 당당한 외침은 마침내 2014년 6월에 이르러, <박근혜정권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의 바다>, <촛불항쟁>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무능과 기만, 총체적인 위기의 <박근혜정권>에게 이제 더 이상의 출구는 없습니다. 이미 <세월>호와 함께 <정권>의 신뢰도 침몰하였고 분노한 민중들이 서명으로, 집회와 시위로, 파업으로 힘을 모아 마침내 <제2의 6월항쟁>으로 폭발시키겠다며 힘차게 투쟁해나서고 있습니다.
코리아연대는 우리민중이 거대한 항쟁의 해일로 박근혜<정권>을 쓸어버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참된 민주정권, 자주통일정권을 세울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날, 이땅에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이 승리하는 광장에 강희남의장님, 박창균대표님 모두 환한 미소지으며 부활하실 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강희남의장님! <제2의6월항쟁>의 마당으로 전진하며 투쟁하는 민중들이 보이십니까. 보이신다면, 다시금 투쟁대열의 진두에서 사자후를 토하시던 그 모습, 그 기백으로 우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흰 도포자락 휘날리시며 청와대와 미대사관을 향해 절대로 물러서지말고 진군하라고 외쳐주십시오. 단 한번만이라도 그 목소리를 듣는다면, 투쟁하는 민중의 대오든 그 대오의 사기든 모두 백배가 되어 반드시 결정적인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 것입니다.
강희남의장님, 박창균대표님 그립습니다. 정말 그립습니다.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후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실 두분의 뜻을 따라, 오직 <강희남정신>으로 살고, <항쟁정신>으로 살겠습니다. 언제나 투쟁의 선봉이 될 것이며 끝내 승리의 그날을 안아올 것입니다. 강희남의장님, 박창균대표님, 언제나 우리의 투쟁에 함께 하소서.
2014년 6월5일 |
흰돌 강희남 의장 약력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농가 강학용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5년 초등학교 졸업 후 한문수학 및 독학의 길로 접어들다
1935년 정복님과 결혼 후 예수교에 입교하고 슬하에 3남 4녀를 두다
1947년 한국신학대 입학하다
1950년 익산에서 중학 교사로 부임
1952년 군산 영명 중학 교사로 전임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다
1959년 몇 교회들을 거쳐 전주 영생중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
1963년 전주 성광교회를 비롯하여 난산교회 등 목회에 전념
1977년 난산교회 시무 중 박정희정권에 도전하다가 전주교도소에 투옥, 1980년 초에 출옥
1977년 9월 광주고법 첫 공판일에 윤보선 내외 등 1천여명의 방청객들이 방청하려했으나 재판을 연기,
이에 경찰 및 공안기관에 맞서 민중 난투극이 벌어져 부상자 속출
1979년 광주교도소 수감 당시 장남이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와 대전으로 송치됨
1980년 초 대전에서 출옥
1983년 문익환 목사와 민통련을 창립하고 대의원총회 의장에 취임. 이 해에 아내와 사별
1983년 기독교농민회 이사장을 겸하여 4개년을 지내다
1987년 전북대 강연으로 2차 투옥되어 전두환의 호헌조치 반대 옥중단식투쟁에 들어가 40여일을 지내다.
그해 6월 민중항쟁으로 출옥하다
1988년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다
1990년 저서 ‘역사속의 실존’을 출간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다. ‘령성과 해방’을 번역 출간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조문시도 사건으로 3차 투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취임(초대의장). 범민련 관계인사 29명과 함께 투옥 됨(4차 투옥)
1996년 저서 ‘민중주의’ 출간
1999년 10차범민족통일대축전 추진본부 의장을 맡아 박창균통일선봉대장 등과 함께 성황리에 개최한 후 수배,
명동성당에서 4개월 동안 농성 투쟁 전개
2000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사임
2003년 저서 ‘동북3성을 가다’(력사기행)을 출간하다
2004년 4월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련방통추) 결성
2004년 독일 동포들 초청강연으로 유럽행을 떠나다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라크 파병 저지운동으로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 시위를 강행
2005년 5월 미군추방투쟁공대위 결성
2005년 5월10일-7월17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를 위해 동상 앞에서 69일 동안 투쟁
2006년 용산 양키기지 앞과 양키대사관 앞 양키추방 투쟁 54회 진행
2008년 저서 ‘정리된 상고사’를 출간
21세기코리아연구소 주최의 제1회 파리국제포럼 참석
2009년 6월 6일 ‘리명박을 내치자’라는 남기는 말(유서)을 남기고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향년 89세
김동관기자
*기사제휴 : 21세기민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