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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노동자회 교양학교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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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일 오후3시 서울 서대문구근로자복지센터 교육장에서 진보노동자회 교양학교가 개최됐다. 교양학교는 ‘진보진영 대선대응’이라는 주제로 진보정책연구원 김장민연구위원이 강연자로 나섰다. 같은날 열린 생명평화대행진 서울행사 때문에 참석인원이 많지 않아 좌담회형식으로 진행된 교양학교는 인원수와 무관하게 시종일관 진지하고 열띤 토론의 자리가 됐다.

 

김장민연구위원을 시작으로 진보정당활동위주의 자기소개시간을 가졌다. 평당원부터 중앙당활동까지 다양한 이력이 공개됐다. 이후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성장요인에 대해 살펴봤고, 진보정당운동의 붕괴원인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후 대중적 진보정당의 복원, 대선대응에 대해서는 주로 강사의 주장을 청취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강연 마지막은 청중들의 소감발표와 함께 짤막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두시간여의 강연으로 부족해서 다른 일정으로 갈길 바쁜 강사를 눌러앉히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마저 열띤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생명평화대행진 해단식과 문화제에 참가해 실천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진보노동자회 교양학교를 모두 마무리했다.

 

아래는 김장민연구위원의 강연문 전문이다.

 

 

평가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제2진보정당운동에 나서야

 

김장민 진보정책연구원 상임연구위원

 

* 본 글은 진보정책연구원과 무관한 개인적인 주장입니다.

 

1.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성장 요인

 

1) 역사적, 정세적, 제도적 요인

 

첫째, 민주노동당은 반세기에 걸친 자생적 진보세력과 민중운동의 역사적 결과물이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거쳐 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출범되었다. 1989년 ‘전국여성농민위원회’,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탄생되었다. 노점상과 철거민은 1989년 ‘전국빈민연합’을, 대학생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계승하여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출범시켰다.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은 2001년에 ‘한국청년단체협의회’를 발족하였다.

 

이밖에도 진보적 교수단체, 의료단체, 변호사단체 등 진보적 전문가들이 각각 전국조직을 결성하였다. 남북화해정책의 결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공동선언 등이 성사돼, 반공정권 아래서 숨죽여왔던 혁신계 잔존세력이 통일운동과 민중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이러한 전국적인 부문조직들은 다시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과 같은 전국적인 총연합조직을 발족시켰다. 이로서 부문대중운동, 민중투쟁운동, 통일운동은 대중적 진보정당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둘째, 민주노동당의 탄생과 성장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세계화 정책과 그 후 보수야당의 실정에 대한 노동자, 농민, 빈민의 반발이다. 특히 1996년 말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등 신자유주의도입에 따른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는 총파업에 나서고, 이러한 총파업의 동력을 기반으로 이듬해 1997년 ‘건설국민승리21’(국민승리)를 창당하여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선거에 출마시켰다. 특히 1997년 대선을 전후로 IMF사태가 터지고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정당과 그 대통령후보가 미국 정부와 국제투기자본의 강압조치에 굴복함에 따라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요구가 높았다. 특히 이러한 요구는 과거 민중당이나 한겨레민주당과 달리 민주노총이라는 노동대중에 기반하고 있었다.

 

셋째, 민주노동당은 소선거구 다수투표제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정당명부제를 쟁취해냈다. 남한의 선거법에 따르면 1명의 당선자를 제외한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표는 모두 사표(死票)가 되기 때문에 각 정당의 전국 득표율과 의석수 비율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2000년 헌법소원을 제기하였고, 2001년 헌법재판소는 ‘1인1표제’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내리고, 국회에 대해 정당명부 비례대표 투표제도를 도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정당명부 비례대표 제도에 따르면 어떤 정당이라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당득표율 3% 이상을 획득하면 무조건 1석을 배분받게 된다. 이에 따라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2%의 득표율에 그친 민주노동당이 2002년 6월에 치른 지방선거 광역의원 정당명부선거에서 8.1%의 득표율을 얻어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2004년 총선에서는 13.1%를 득표하여 8명의 정당명부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2) 주체적 요인 : 진보정당, 민중투쟁조직, 부문대중조직의 3각 편대

 

남한의 경우 내각제, 비례대표제와 같은 협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대신, 다수독점에 근거한 소선구제와 제왕적 대통령제가 보수정당카르텔을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현실에서는 복수의 진보정당이 보수정치 담합구도를 깨고 원내에 진출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진보정치 입장에서는 원내에서 하나의 대중적 진보정당 즉, 범좌파정당을 지향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적 노동운동을 대표해온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를 통해 범좌파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것은 적절한 전략이었다. 배타적 지지는 민주노총부터 시작하여 전농, 전여농, 전빈련, 한총련, 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 부문대중조직으로 확산됐고, 민중연대 등의 민중투쟁조직까지 확산되었다. 진보정당이 분열될 경우 부문대중조직이 서로 다른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문제로 정치적으로 분열되기 때문에 범좌파정당의 건설은 부문대중조직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계급정당의 역할을 내재하고 있는 계급연합적이며, 사회변혁적인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노동당은 창당시기부터 사회주의, 민중민주주의, 사민주의 등 다양한 진보적 노선을 포괄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 영세상인, 진보적인 학생과 여성, 사회적 소수자들을 당원에 포함시켰다. 민주노동당 강령의 내용과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민주노동당은 기존 사회주의 자체가 아닌, 막연하나마 새로운 포괄적인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하고 있으며, 일상적인 대중투쟁과 그를 기반으로 한 선거승리를 집권방법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집권의 주체에 있어서도 계급 연합적 정권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진보적인 원내정당으로서 우측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부문대중조직을 놓고, 좌측에 변혁운동을 지향하는 민중투쟁조직을 놓고 적극적인 제도정치 개입을 통해 대중투쟁을 지원하고 그 파급력을 최대화하면서 투쟁으로부터 얻은 제도적 성과를 다시 부문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을 자기활동의 방향으로 삼았다. 이러한 대중적 진보정당론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사회운동정당론, 혹은 통일전선적 정당론으로 제기돼왔는데, 양자는 2004년 원내진입을 앞두고 ‘거대한 소수전략’으로 사실상 수렴하게 된다.

 

2. 대중적 진보정당의 붕괴

 

1) 2차례의 분당

 

(1) 평등계열의 이탈과 신좌파 원내정당의 실패

 

첫째, 2004년 원내진출까지는 평등계열과 자민통이 경쟁적 협력관계였다.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가한 평등계열을 보면 민중당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을 주도한 진보정당추진 그룹, 평등연대와 다함께 등 사회주의 그룹, 대장정출신의 학생운동 그룹이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창당에 소극적이었던 민주노총 내 일부 평등계열은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민주노동당에 결합했으며, 2003년 하반기 단병호, 심상정 등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경선에 출마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진보정당추진 그룹, 대장정 그룹, 민주노총 중앙파 등이 평등계열의 주류이고 이들 중 일부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을 구성하여 자민통과 대척점에 있었다. 원내진출 직전까지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 등으로 구성된 당 대표단에서 자민통 계열은 소수였고, 대의기구 내에서도 평등계열이 다소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자민통의 집단입당이 늘면서 평등계열의 위기감이 서서히 증가하지만 공존에 대한 자신감을 아직 잃지 않았다.

 

둘째, 평등계열은 2006년 당직선거를 기점으로 권력분점이 불가능한 소수로 전락하여 이후 이탈은 시간문제이었다. 평등계열은 2007년 가을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선출방식을 1인1표로 바꾸려고 했으나, 자민통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어 대통령후보 선출에서 패하자, 평등계열은 자민통과 권력을 균점하는 것이 어렵다고 봤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문제와 일심회 관련자 처리문제로 분열은 현실화되었다.

 

심상정 비대위는 일심회 관련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을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제출했고, 자민통은 일심회 관련자들에 대한 어떠한 당내 처벌도 부당하다며 해당안건을 부결시켰다. 안건부결에 격앙된 심상정 지도부와 평등계열이 대규모로 탈당했으며,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사실상 분당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의원대회가 당기위원회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 부당하므로 당원정보 제공에 대한 당기위반을 이유로 일심회 관련자들을 대의원대회 이름으로 당기위원회에 제소하자는 합리적인 절충안은 양측 모두에 의해 거부되었다.

 

셋째, 평등계열은 2008년 총선에서 독자적인 원내정당 추진이 실패한 후,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원내에 진입하기 위해 진보대통합을 받아들였다. 진보신당의 중심은 명망가였으며, 주요 구성원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였다. 따라서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의 기반이 약했고 서울을 제외하면 지역기반도 취약하였다. 진보신당은 정책아젠다 중심으로 여론을 환기시키고, 제도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원내정당을 지향했으나, 원내진출에 실패함으로써 정당의 존립조건을 획득하지 못하였다. 진보신당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로 그 제도적 근거를 간신히 마련한 후, 진보신당의 명망가와 현실주의 세력들은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그리고 보수야당과의 선거연합을 정치현실로 수용한다.

 

그러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논란, 자민통의 패권과 종북에 대한 우려 등의 이유로 진보신당 내 통합반대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통합세력은 진보대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는 의결권을 확보하지 못해 명망가와 지방의원 중심으로 탈당하여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였다. 진보신당은 진보대통합 이후 허약했던 제도적 기반마저 통합진보당에 흡수당하자, 사회당과 통합했지만 향후 원내정당으로서 생존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넷째, 2008년 분당의 본질적인 원인은 자민통의 패권이었으며, 다만 그 대중적 동력은 종북세력과의 결별이라는 명분에서 형성되었다. 친북 혹은 종북세력과 함께 당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노선의 차이로 인해 단일한 진보정당노선을 폐기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2)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통합, 그리고 분당

 

첫째, 자민통과 국민참여당은 2012년의 겉 목표만 일치했지, 결국은 상대방을 활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들의 밀월관계는 통합되자마자 경쟁관계로 다시 적대관계로 전환하였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에 맞설 수 있는 제3당을 만들어 선거연합과 연립정부를 통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자민통과 국민참여당의 격돌은 중간리더들이 얽혀 있는 총선후보문제에서부터 발생하였다. 특히 당권을 장악한 경기와 광주전남을 한축으로 국민참여당을 다른 축으로 한 권력투쟁이 촉발되었다. 통합진보당의 공동대표와 사무총장, 야권연대협상대표 등 실권을 장악한 경기와 광주전남은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

 

또한 이들은 진성당원의 투표제도를 활용하여 당원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신들의 숨은 실력자를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시켰다. 이들은 청년국회의원 경선에서도 집중투표하여 자기계열의 당료가 비례대표 3번을 차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관악을과 성남중원에서는 자파 후보를 교체하면서까지 야권단일후보의 기득권을 유지하였다. 모두가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절차를 따랐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당권을 장악한 패권세력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결국 경기와 광주전남 세력은 국회의원 의석 13석 중 비례 2석과 지역구 4석 등 총 6석을 차지하였다. 이들이 당선된 지역구 4곳은 모두 과거 민주당이 강세이고, 민주노동당이 독자적으로 당선시킬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야권단일화협상에서 특혜를 누렸다는 당 내 반발이 거셌다.

 

둘째, 경기와 광주전남이 후보단일화와 정당명부의 특혜를 과점하고 반대세력이 이를 무효화시키려다 권력투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경기와 광주전남의 독식, 부실, 불공정은 다른 정파들의 분노와 견제를 불러일으켰다. 패권에 반대하는 세력들 역시 패권을 견제하겠다는 주관적인 판단이 앞서, 비합리적인 조치를 시도하여 내분을 격화시켰다. 한마디로 원칙 없는 통합, 아니 오로지 권력을 위한 통합 때문에 당이 게임의 룰, 즉 절차적 민주주의까지 실종된 권력투쟁의 장이 된 것이다.

 

셋째, 패권은 진보적 정체성 내부의 한계이나 자유주의정당과 통합하는 우경화는 진보적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오류라는 점에서 통합진보당 일부가 국민참여당 계열과 함께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을 만든 것은 진보로부터의 일탈이다. 국민참여당 계열은 패권의 문제를 조직내부 투쟁으로 풀지 않고 조직이탈로 치달았다. 중앙위원회의 사퇴결의를 따르지 않은 김재연, 이석기 의원을 중앙당기위원회가 제명 처리하였으나, 이러한 결정에 따를 의무가 있는 의원단 총회가 두 의원의 제명을 부결시켜 분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두 의원의 제명부결이 특정정파에 의한 다수결의 폐해이나, 그 자체가 조직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어찌됐든 의원단총회가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정당법에 의해 당헌과 당규보다 더 높은 효력을 지니고 있고, 원내 합법정당으로서 정당법을 준수해야 하였다. 따라서 이것이 직접 조직을 파괴하는 분당의 도화선이 될 수 없었다.

 

패권은 정체성을 같이 하는 조직 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조직 내의 민주화투쟁의 대상이지, 조직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건강한 세력들이 압도적인 명분과 세력을 형성하여 패권세력을 어떻게 통제 혹은 견인하느냐의 문제이다. 정당에는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고, 세력균형이 깨질 수 있으므로 결국 민주주의 혁신이 없으면 패권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신당의 재분열을 보더라도 분당은 패권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2) 배타적 지지의 소멸

 

민주노동당의 붕괴는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뼈아픈 지점이다. 향후에 민주노동당과 같이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 부문대중조직뿐만 아니라 민중연대와 진보연대 등 민중투쟁조직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 대중적 진보정당이 다시 출현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라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이후 진보양당 등에 대한 지지문제로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자, 배타적 지지방침은 큰 타격을 받았고, 통합진보당의 분열사태 직후 민주노총은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였다. 민주노동당을 계승한 통합진보당이 분열로 인해 정당으로서 동일성을 상실함으로써, 민주노총 이외의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도 사실상 소멸되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배타적 지지는 내용적으로 위기에 처해왔다. 배타적 지지단체들은 민주노동당에 재정, 인력 등을 지원하면서까지 당의 대중단체에 대한 요구를 수용해왔지만, 거꾸로 자신들의 요구가 당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부문대중조직의 이해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주력하고 있다고 봤다. 사실 민주노동당 내 평등계열과 자주계열은 노선경쟁을 당권과 의석확대라는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는데, 대중조직의 구성원은 당원으로서 이러한 갈등에 동원되었다. 대중조직들은 기층의 계급적 이해관계실현을 통해 명망가의 우경화, 기회주의, 출세주의 등 원내정당의 부정적 요소들을 견제하려고 노력해왔지만, 대중조직 자체가 노선과 조직 측면에서 정파구도라는 민주노동당의 한계 자체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당 문제에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3) 자민통의 분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분열과정에서 자민통 역시 분화과정을 겪었다. 평등계열이 상대적 다수를 점했던 민주노동당 초창기부터 2006년 당직선거까지는 자민통 이외에 넓은 의미의 자주계열까지 각종 투표와 표결에서 평등계열에 맞섰다. 그 이후 자주계열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자민통의 패권이 문제되자, 2006년 말 경기도당 위원장 선거에서 보듯이 자주계열 중 일부가 자민통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안별로 평등계열과 공조하였다. 자민통 그룹들은 분당과정에서 자민통의 패권과 폐쇄적 조직문화가 부각되자, 자민통 전국모임을 공개적으로 해산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에는 자민통 내부의 조직확대 경쟁과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인천연합 계열이 자민통의 색채를 약화시키면서 좀 더 대중적인 합법정당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1인1표제, 순수집단지도체제, 당원총투표 등의 도입을 시도했으나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에서 다른 자민통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2008년 분당사태가 마무리된 후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상당수 자주계열들이 경기, 울산, 광주전남, 실천연대 등 당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과 함께 이수호 전 민주노총위원장을 당대표로 지지했으나 당선시키지 못했다.

 

2011년 진보대통합 과정에서 인천연합 계열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소극적인 진보신당과 부문대중조직을 고려하여 사실상 국민참여당과의 선통합을 내용으로 하는 대의원대회 안건이 부결되는데 힘을 실었다. 통합진보당 출범 이후 인천연합 계열은 통합연대와 국민참여당 계열과 함께 소위 신당권파 세력연합에 속했으며, 나아가 진보당 분열과정에서 이들과 함께 진보정의당을 창당하였다.

 

2012년 9월 13일 민주노동당 전 국회의원 3명과 전 최고위원 8명이 탈당선언을 했는데, 이들 중 일부가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자민통계열이며, 그 중 일부가 진보정의당에 합류하였다.

 

통합진보당 내에서 경기와 광주전남이 다수세력의 축으로, 부산울산경남이 소수세력의 축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제도정치 내의 고립을 피하고자 일정한 변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들 양 세력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진보당 내부의 비판과 균열도 불가피하다. 자민통이 진보정치 내에서 주요세력이며, 상당한 대중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민통의 이론적 조직적 분화는 장기적으로 패권이나 친북, 경직적인 문화를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의 세력균형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보수세력은 자민통의 본질을 주체사상 신봉하는 사회주의자 세력으로 보면서 제도정치에서 축출하려고 한다.

 

4) 사회주의 계열의 이탈

 

첫째, 사회주의세력은 원내정당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민주노동당의 ‘노동해방실천연대’ 즉 구 평등연대가 2008년 분당과정에서 탈당하였다. 2011년 국민참여당과의 통합과정에서 전태일 노동자대학, 일부 노동현장 그룹 등 사회주의자 그룹들이 탈당했으며, 다함께는 2012년 진보당 사태 이후에 탈당하였다. 자민통의 상층부 역시 사회주의세력으로 볼 수 있으나 대외적으로는 자민통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둘째, 사회주의세력이 입당전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공동전선적인 원내정당은 여전히 필요하다. 사회주의세력은 계급갈등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독자적인 정당을 구성할 만큼의 세력과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세력은 당분간 국가보안법과 소선거구제 그리고 정당요건 등 진입장벽을 뛰어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노맹, 국제사회주의자 그룹 사건에서 보듯이 북한과 관련이 없는 사회주의계열 조직도 반국가단체 혹은 이적단체로 처벌해왔는데, 최근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와 ‘노동해방실천연대’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에서 보듯이 그 흐름은 변화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정당이 그것도 다른 진보정당과 분열된 상태에서 소선거구제에서 1등으로 당선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당법에 따르면 16개 광역단체 중 5곳 이상에서 각 천명 이상의 당원이 확보돼야 합법적인 정당이 가능하다. 실제로 최소한 7000명 내외의 유권자가 사회주의 정당에 정식으로 입당해야 한다. 이밖에도 공직선거법에 따라 정당명부 득표율이 2% 이하이면 정당의 등록이 말소된다.

 

물론 제도권 밖의 소규모 정치단체로서 사회주의 그룹이 존재할 수 있으나 현대 대의정치에서 각종 선거에 참여하여 원내 활동을 하는 정당이 아니라면 실질적인 사회변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제도공간만으로는 변혁이 불가능하지만 제도공간조차 없다면 변혁은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조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합법적인 정당활동을 하려면 그나마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공동전선적인 진보정당, 혹은 낮은 단계의 통일전선적인 정당 즉,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다.

 

셋째, 지금까지 분산돼왔던 사회주의세력이 공동전선적 진보정당 내에서 경험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사회주의세력연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세력은 민주노동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자민통의 통일전선과 평등계열의 사민주의에 밀려 주변부 세력에 머물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주계열의 사회주의세력 역시 사민주의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붕괴과정에서 드러난 자민통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측은 일정한 공감대 아래 사회주의연합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3. 대중적 진보정당의 복원

 

1) 분당프레임이 아니라 진정한 진보정당 건설 프레임을 설정해야 한다

 

패권반대투쟁이라는 방향설정은 옳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 면에 있어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이고, 나아가 패권청산을 당 청산의 조건으로 과도하게 설정한 것은 잘못이다. 패권은 정체성을 같이 하는 조직 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조직 내의 민주화투쟁의 대상이지, 조직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패권세력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당을 창당한다는 논리는 궁색하다.

 

통합진보당의 사분오열은 자민통이나 평등계열 모두에게 양적 분열이자, 진보적 정체성의 균열이다. 이로써 제1기 원내 진보정당 운동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은 진보정치의 대표로서의 성격을 잃었다. 그렇다고 국민참여당 세력이 주요정파로 참여하고 있는 진보정의당을 평등계열의 원내정당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민주노총 당원들 중 상당수는 민주노총의 새로운 정치방침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분간 기존정당에 편입되지 않은 채 정당활동을 유보할 것으로 보인다.

 

현 선거제도에서 복수의 좌파정당이 원내에서 의미 있는 세력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은 진보의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 심각한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또한 보수언론과 보수세력은 상호공멸의 경쟁을 조장하며 진보정당 시기상조론을 유포시킬 것으로 보인다. 보수야당은 부분적으로 진보적 정책을 수용하고, 일부 공천지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분열된 진보정치를 포섭하려고 할 것이다.

 

자민통을 포함한 자주계열이나 평등계열은 이러한 진보정치의 위기에서 진보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남으려면 원내단일정당 노선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부문대중조직이 통합돼 있는 한, 이들의 정치방침이 분열되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은 단일한 진보정당을 요구할 것이다. 진보정치가 대선국면에서 분열의 자기 파괴적 결과를 각성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5.31합의문을 도출했던 진보정치통합을 위한 원탁회의가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다시 추진한다는 원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향후 제2기 원내 진보정당 운동은 자주계열이나 평등계열 혹은 사회주의세력부터 사회민주주의세력까지 공존하면서 특정 노선이나 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공동전선적 성격의 하나의 원내 대중적 진보정당 즉, 세력연합, 가치연대의 범좌파정당 건설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의 실패로 보아 자민통이 추구하는 높은 단계의 통일전선적 정당은 당분간 성공할 수 없다. 공동전선적인 정당, 낮은 단계의 통일전선적인 정당이 성공하려면 당내에서 협의제 민주주의, 권력분점, 합리적 의사결정, 현대적 정파문화 등이 구축돼야 한다. 또한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청년학생운동이 정당의 정파구조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중적 역량으로 진보정당 내 정파긴장을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방안을 보면, 대선을 전후로 하여, 특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중 중심의 진정한 진보정당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논의하는 진보적 연석회의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당장의 탈당여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구체적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탈당여부는 각 세력과 개인의 정당운동에 대한 신념, 조건과 처지에 맞게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혼란이 궁극적인 진보대통합과정에서 역할분담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

 

먼저 나가 신당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을 수 있고, 설득력 있는 대안이 가시화되면 탈당과 분당의 비판을 최소화하면서 세력전환의 방식을 추진할 수 있고, 끝내 새로운 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대선 이후 변화된 조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진보대통합을 주창할 수도 있다. 어쨌든 기본가닥은 어디에 있든 진보적 연석회의에서 새로운 정당건설과 진정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진보정당과 노동중심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이 당분간 각각의 명분과 세력을 구축한 후 향후 대선을 전후로 하여 구성될 가능성이 높은 연석회의의 논의발전에 맞춰 새로운 진보정당으로의 전환을 모색할 수 있다.

 

2) 청산의 대상은 패권형태이지, 패권세력이 아니다

 

진보당의 패권세력과 결별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고 해도 기존의 패권세력은 잔존하고, 새로운 정당에서도 새로운 다수 세력이 생기므로 이들 역시 새로운 패권세력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사람과 세력은 항상 독단과 패권의 가능성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인적청산의 방법을 택한다면 결국 같이할 사람과 세력이 없어질 것이다. 동지적 관계라면 그 동지가 독단과 패권을 청산하거나, 우리가 청산시킬 힘이 있다면 사람과 세력까지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동지적 관계에서는 패권을 청산한다면 다시 동지적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상층부들을 논외로 한다면 적게는 수천명에서 만여명에 가까운 진보적 대중들을 패대기칠 수 없다. 패권세력과 별도의 진보정당을 만든다고 할 때 시간과 조건의 문제이지, 결국은 진보대통합의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결국 건강한 세력들이 압도적인 명분과 세력을 형성하여 패권세력을 어떻게 통제 혹은 견인하느냐의 문제이다. 진보정치혁신모임에 제도적 동력이 실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보정치혁신모임이 진보정치의 대표성을 갖기 힘들고, 그 추진방식도 정당하지 않다. 반드시 명망가의 한계와 우경화의 가능성을 견제할 수 있는 대중적 동력이 전제돼야 한다.

 

3) 참여계와 관련한 우경화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 필요하다

 

지난 진보대통합의 결말은 방법론적으로 대중적 방식이 아닌 명망가의 합의방식으로 추진됐다. 내용적으로 국민참여당이 참여함으로써 주체와 노선, 문화 측면에서 정체성의 후퇴를 가져왔다. 노동자, 농민, 빈민의 요구를 진지하게 반영하는 대중적 방식을 택했다면 이러한 오류는 차단될 수 있었다. 진보당의 창당 이후에도 이러한 명망가 중심의 당 운영, 그것의 본원으로서 정파 중심의 당 운영은 심화돼왔다. 민중과 당원과 괴리된 명망가와 정파의 당 운영, 그로인한 갈등은 결국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참여당의 진보정당 참여는 진정한 반성과 진보세력으로의 탈바꿈이 전제였다. 문제는 이 부분이 아직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새로나기 특위의 애국가 논쟁이나 기타 노선논란을 보건대, 참여계의 상당수는 자신의 환골탈태보다는 무엇이 진정한 진보인가의 관점의 차이로 문제를 희석시키고 있다. 운동권의 진보가 변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어, 오히려 구진보를 가르치겠다는 신진보의 자세로 오인 받고 있다. 무엇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저항에서 자신의 존재기원을 찾는 노동자, 농민, 빈민 조직의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참여계의 연석회의 결합여부가 아니라 반드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들이 진보정치 속에 용해된다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과거의 잘못 때문에 진보정치의 성원이 될 수 없다는 관문주의는 배격돼야 한다. 그렇지만 과거불문이라는 것이 과거에 대한 평가와 책임에서 무조건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평가에서 현재의 지위와 위상이 도출되는 것이다. 백의종군의 자세로 임해, 신뢰와 성과를 기반으로 그에 걸 맞는 대우를 받는 것은 향후 미래의 과제이다.

 

그러나 과거의 세력을 보존한 채, 과거의 노선을 명백하게 청산하지 않은 채 하나의 조직으로서 참여하고, 그에 따른 지분을 보장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더구나 새로운 정당이 민중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해 참여계가 다수가 된다면 분명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진보적 연석회의에서 만장일치가 없는 한 참여계를 세력으로서 참여시키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물론 이미 진보당의 성원으로서 진보정치 혁신모임의 하나의 흐름으로서 이들을 배제하기는 현실적으로나 명분적으로나 머쓱한 상황이다. 참여계의 자중과 이러한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대중들의 압도적인 참여로 이 문제를 우회할 수밖에 없다. 최종적으로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

 

4) 완주가 아니라면 야권 개방경선제 참여를 검토할 수 있다

 

이번 대선과정을 통해 진보정치를 복원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박근혜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분열로 인해 진보정치의 대선후보는 진보대통합이나 정권교체에 힘을 보태기에 역부족인 상태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후보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면서 제도정치에 의해 외면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정당이 분열된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후보가 복수로 나올 경우 진보정치 분열의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려운 조건에서도 진보정당의 후보가 하나가 돼 진보정치가 힘을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향후 하나의 대중적 진보정당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분열의 당사자들이 다시 힘을 합칠 의사나 명분 동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분열된 진보정치는 자신이 어느 당적을 갖고 있든, 혹은 당적이 없더라도 대선에서 진보정치의 단결을 추동하여 향후 진보대통합의 기운을 만들어야 한다.

 

진보정당이 독자후보를 발굴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켜 독자적 기반을 확대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완주할 것인가 혹은 후보단일화를 할 것이냐의 문제는 정세와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선거전술이다. 결선투표가 없는 단순다수결 체제에서 진보정당의 독자출마가 정권교체의 걸림돌이라는 편견에 대항하면서 진보적 정책을 제시하는 과정이라면 야권연대는 정권교체에 기여하면서 진보적 정책을 일부 실현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야권연대의 성과를 본다면 정책연대를 통해 민주당을 좌측으로 견인할 수 있다.

 

나아가 새누리당까지도 이러한 정책기조를 일부 수용하도록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제 독주체제에서 행정부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분점할 수 없으므로 국회의 환노위, 복지위, 교육위 등의 특정 상임위원회의 주도권을 보장받는 것이 현실적이다.

 

올해 대선에 있어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유신세력의 부활을 끊어야 한다는 국민여론이 매우 높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진보당은 이미 수차례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야권단일후보 논의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한편으로 진보대통합의 실패로 인해 진보정치가 독자후보를 내 과거처럼 완주하자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물론 독자후보를 발굴하여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보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옳으나 후보등록을 전후로 하여 야권연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진보정당과 민주당이 정책연대와 일부 권력의 분점, 명분 있는 경선방식 등에 합의한다면 국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경선을 통해 야권단일후보를 정할 수 있다. 개방형 국민경선은 우리 대통령선거에서 결선투표제가 없는 상태에서 진보정치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정권교체 여론에 부합하는 명분과 실리를 찾을 수 있는 차선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끝>

 

 

진영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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