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아카이브 2013 한진중공업 한진지회 간담회 “우리는 전투모드입니다!”

한진지회 간담회 “우리는 전투모드입니다!”

 
진보노동뉴스와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는 20일오후 덕수궁 대한문앞에 마련된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열사시민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한상철부지회장과의 간담회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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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 반갑습니다. 코리아연대 집행위원장 이상준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단체회원들, 학생들과 함께 연대차 찾아왔습니다. 이쪽은 취재를 나온 진보노동뉴스 김동관기자입니다. 
 
김동관 : 안녕하십니까?
 
한상철 : 한 2번 들어가봤던 것 같습니다. 핸드폰으로요. 우리 관련한 기사였어요.
참고로 제 귀가 한쪽이 안들려서 못알아듣습니다. 조선소가 좀 시끄러운 데가 되가지고 귀가 굉장히 난청입니다. 오른쪽은 안들립니다. 양해바랍니다.
 
이상준 : 먼저, 소개를 부탁합니다.
 
한상철 : 한상철이라고 하고요. 부지회장입니다. 우리 노동조합은 일반노동조합하고 생태가 좀 다릅니다. 전투모드입니다. 그래서 부지회장들이 굉장히 많고요. 정책단입니다. 소위말하는 노동조합지도부입니다. 정책을 짜고 전체를 지휘하는데 상당히 많고, 일반 부서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조직부서가 굉장히 많습니다. 조직1부장부터 6부장까지 있습니다. 인원은 얼마 안되지만, 다 뺏겨가지고, 열 몇명정도 됩니다. 
 
이상준 :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지회인가요?
 
한상철 : 아닙니다. 정규지회인데 복수노조에 다 뺏겨가지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 조합원은 190명정도 되고요. 간부가 70명정도 됩니다. 전조합원의 간부화랄까요?

 

  

이상준 : 복수노조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상철 : 복수노조는 사측노조입니다. 
복수노조법에 의해 만들어진 노조인데, 정리해고투쟁을 한창 할 때, 사측에서 불과 4개월만에 전략적으로 만들기로 기획을 합니다. 2011년 4월쯤에 사측의 배후조종을 받은 그 당시 집행간부들이 정리해고 과정속에 대거 사퇴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복수노조를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죠.  

김진숙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오기 한달전에 선거를 치렀는데, 거기서 이들이 출마를 합니다. 우리에게 완패하죠. 사측에서 돈을 엄청썼어요. 이들을 당선시킬라고. 별짓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낙선됩니다. 이후에 이들은 본격적으로 2011년 11월부터 복수노조를 사측의 배후조종속에서 만듭니다. 법인카드까지 지급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게 하고, 2012년 1월14일날 태동을 합니다. 발기인 17명을 만들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조합원들을 대거 빼갑니다.

 
빼가는 과정은 당시 2년간의 싸움에 지친 조합원들에게 생계비를 미끼로 던집니다. “1000만원을 지급하겠다 다만 복수노조만 지급하겠다. 금속노조는 주지않겠다”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 휴업이 대거 들어가 있는데 ‘복수노조를 가면 휴업을 안보낸다. 금속노조에 가면 휴업을 보낸다’그러니까 우리가 조합원이 한 800명 되는데 한방에 약 500명이 싹 다 넘어가요. 

그후 복수노조가 과반노조 즉, 대표노조로 자리잡게 되고 작년 7월부터는 대표노조로 인정받아 결국 사측의 하수노조로 전락합니다. 언론은 우리 조합원들이 염증을 느껴서 갔다고 얘기들 많이 하는데, 실제론 돈과 휴업을 미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 협박, 회유 이걸로 다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 조합원들은 190명정도 됩니다. 해고되었다가 복직된 사람들이 92명인데, 그중 4명이 복수노조로 갑니다. 복수노조로 간 사람들은 현장복귀, 복수노조로 안 간사람들은 현장복귀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소속이던 강서도 그리 됐습니다.
 
 

이상준 : 싸움이 오늘로 며칠째 되지요?
 
한상철 : 62일째 열사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258일 천막농성을 진행했죠. 중간중간에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사측하고 우리하고 정부, 국회 중재로 복직을 하기로 했었죠. 
2011년 11월9일날 김진숙지도위원이 내려오면서 합의를 봤잖아요. 김진숙지도가 내려오면서 알려지기는 ‘92명 복직한다. 손배가압류는 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결국 손배가압류도 때렸고, 복직도 복직하자마자 3시간만에 전부 무기한 휴업을 때렸습니다. 복수노조로 간 사람들은 현장으로 복귀시키고 ‘현장복귀=복수노조, 금속노조=강제휴업’ 이렇습니다. 이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상준 : 현재 사측과 쟁점은 무엇입니까?
 
한상철 : 우리가 사측하고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약속을 지켜라”라고 주장한 때부터입니다. 
먼저 사측이 158억3000만원을 우리에게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과 다음으로 큰 틀에서 민주노조 인정인데,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휴업을 차별하지 마라. 똑같이 해달라. 우리만 일방적으로 휴업하지 마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운영하던 매점이 있습니다. 사측이 일방적으로 폐쇄시켰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쓰는 노동조합에 대해 회사 밖으로 나가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각종 구질구질한 것들이 굉장히 많죠. 그것이 큰 틀에서 민주노조인정과 사수고요. 이 2가지에 회사정상화를 더해서 총3가지입니다.
 
회사는 필리핀에 2007년도에 공장을 만들고 모든 물량을 필리핀으로 다 빼돌리고, 영도에는 4년간 제로상태로 일자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대해 회사를 정상화시키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준 : 조합 지도부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상철 : 총7명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라하면 지회장이 있고, 부지회장이 2~3명정도 있습니다. 조직, 정책, 조통, 후생, 노동안전, 문화체육, 쟁의 이렇게 세분화돼있거든요. 
지금은 소위 말하는 전투전형인거에요. 전투모드로 지회장이 있고 바로 밑에 부지부장을 두면서 각부문별로 책임을 맡게 합니다. 정책담당, 조직담장, 문화체육담당, 교육선전담당 이런식으로 하고 지회장과 부지회장, 사무장까지 8명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을 하는 토론을 주로 합니다. 나머지 상집간부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조직이 원래 2명인데, 우리는 열몇명정도 됩니다. 싸우기 위해선 조직을 강화시켜야 되니까요. 문화체육도 조직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쪽에만 무려 15~16명입니다. 나머지는 1~2명씩 되는데 거의 하는 업무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교섭권도 없으니까요. ‘전투모드’라고 보면 됩니다.
 
김동관 : 최강서열사부인이 상경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전에는 환경노동위원회 여야간사들도 만나고 박근혜집앞에서 기자회견도 진행했습니다. 해결기미가 보이고 있습니까?
 
한상철 : 해결기미는 거의 안보이고 있어요. 정치권에서는 말로는 ‘도와주겠다. 중재를 하겠다’ 하지만 실제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민주당같은 경우도 2일전에 찾아갔더니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다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문희상의원도 찾아왔고, 이석행, 한정혜, 정선옥, 은수미의원등이 찾아와서 “여당대표를 만나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겠다” “기자회견을 하겠다” 등 다양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로 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재를 한번 서기는 했는데, 은수미의원이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안하고 우리가 농성도 풀고, 시신도 장례식장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적도 없는데. 그러면서 새누리당 김성태의원하고 둘이 교섭날자도 일방적으로 잡아가지고 언론에 공표해버렸어요. 결국 우리가 농성을 접는 걸로 시신도 가는 걸로 돼서 그래서 전부다 우리도 황당했죠. 여야간사들끼리 저그들 마음대로 결정해서 그리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교섭장에 나갔지만 사측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정치권에서 나서도 별로 하는 것 같지 않고, 자꾸 찾아가니까 그냥 의례적인 답변만 듣는 거에요. 이제는 정치권에 안가겠다는 것이 우리 입장입니다. 
 
 
 
 

김동관 : 최강서열사 시신은 아직까지 공장에 있는 것이지요?

 
한상철 : 22일째 되었습니다. 이건 참…안타까운 이야긴데… 옛날에 해봐서 우리가 그걸 잘해요. 
특이한 기술을 갖고 있는 거죠. 관에다가 스티로폼을 넣고 거기다가 드라이아이스를 넣습니다. 밖에다가 관을 하나 더 짜고 거기다 드라이아이스를 넣습니다. 그러니까 이중으로 싸는 겁니다. 그러면 안쪽 거는 3,4일에 한번 갈면 되고, 밖에 거는 2일에 한 번 갈면 되고, 그런식으로 드라이아이스를 쓰면 되는데, 이제는 드라이아이스를 쓰면 시신이 부패는 되지 않는데, 말라버려요. 
우리 동지들이 이틀에 한번씩 관을 엽니다. 시신이 말라가요. 수분이 빠지는 거죠. 정말로 미이라형태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지점이 있어요. 
 
(한진중공업에선 1991년 박창수열사, 2003년 김주익, 박재규열사, 2012년 최강서열사에 이르기까지 4명의 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김동관 : 최강서열사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요?
 
한상철 : 지금 여섯살, 일곱살 됐는데, 유치원 다닙니다. 둘다 할머니하고, 그러니까 강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키우고 있는데, 두분 몸이 안좋아서 고생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큰 녀석은 조금 괜찮은 것 같은데, 작은 애가 아빠하고 엄마찾고, 큰 애도 학교가면 아빠하고 엄마 돌아온다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작은 애가 굉장히 개구쟁이에요. 밤마다 엄마를 자꾸 찾고, 엄마가 공장안에 있으니까. 
한번 나올 수는 있는데… 유족 딱 2사람만 드나들 수 있거든요.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공장안에 고립돼 있습니다. 나오면 딱 끝입니다. 다신 못들어 갑니다. 그래서 유족은 들락날락하는데, 강서부인이 집으로 안가고 와서 잠깐 아이들보고 뒤치다꺼리할 것 있으면 잠깐 나오는 것외에는 누나하고 피케팅도 하고 출근투쟁도 하고 있습니다.
 

 

 

이상준 : 사회단체나 노동진영에서의 연대는 잘 되고 있습니까?
 
한상철 : 14일부터 부산대책위차원에서 부산공장앞 천막농성장에서 시국농성을 진행하고 있고요. 박근혜취임식까지 할 것 같고 여기는 3일째 됐고요. 민주노총에서 각지역별로 돌아가면서 부산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천막에는 우리 동지들이 거의 없습니다. 전부다 상경을 했기 때문에 천막안에는 빈소지키는 요원하고 필수요원만 남아있습니다.
 
김동관 : 유족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한상철 : 유족분들은 우리에게 완전히 위임했습니다. 한진지회에 모든 교섭권을 책임지우겠다며 서명한 합의서까지 작성했습니다. 그 정도까지 맡겨놓은 상태입니다. 강서미망인의 경우 점점 투사가 돼가고 있습니다. 누나하고 같이요. 요즘은 다른데까지 눈을 돌려서 트윗을 통해 글을 올리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SNS활동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상준 : 식사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한상철 : 뭐 알아서 사먹고 있습니다. 밥집은 체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부다 각개전투로 하니까요. 우리가 4단위로 움직이거든요. 박근혜 집앞에는 아예 고정했고, 조남호 집앞에도 시간이 되면 가고, 한광옥사무실 앞에도 가고, 다른 곳에 연대도 하고 아침저녁 선전전하고 촛불집회도가고 그렇게 움직입니다. 
 
박근혜 집앞에는 바로 길건너로 아주가까이에 자리잡았습니다. 하루 한번씩 박근혜가 출퇴근 하는데 그때면 경찰들이 피켓을 보지 못하게 다 막아버려요. 거긴 사복조들이 있거든요 1, 2개 중대가 와있는데 완전히 보지 못하게 인벽을 쳐버립니다. 이런 인벽 때문에 박근혜가 모를수가 있다는 우스개도 왕왕합니다. 
 
의외로 1인시위는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한 상태입니다. 왕복 일차선이차선 거리인데 딱 고정도 거리까지입니다. 마주보고 있어요. 길 건너편 경호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몇명만 모이면 집시법위반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안했는데도요. 그래서 일부러 장난도 치고 그랬어요. 거기서 술먹고, 생일파티도 하고, 경호원들하고 티격태격 많이 했죠. 경호원들이 자꾸 시비를 걸드라고요. 여러번 싸웠는데, 지금은 조용합니다.

 

 

김동관 : 최강서열사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한상철 : 강서는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화통하고요. 노조간부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어요. 정리해고 직전에 노조간부를 맡았고요. 호탕하고 술을 좋아하고 이러다보니까 의리라는 것을 상당히 중시했던 친구에요. 
실제 정리해고 투쟁하면서 노조활동과 노동자투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짤려야 되는지, 나는 그냥 일한 죄밖에 없는데…”라면서 정리해고투쟁을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합의보고 복직을 1년 앞두고, 회사에서 생계비를 2000만원인가 지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네식구를 데리고 살기가 힘드니까 정말 힘든 노동일을 했어요. 아르바이트를요. 거기가서도 보통 해고자들끼리 뭉쳐서 일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힘든 일을 자기가 하는 그런 친구였어요. 미화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친구였어요. 
 
생계를 위해서 그러다가 노동조합이 천막을 치고 굉장히 어려워지니까, 사실 우리가 해고자90명들에게 요구를 했어요. “같이 노조간부를 하자 그래야 싸워나갈 수 있다. 우리가 천막을 지키고 있으니까”하고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18명 중에 한명입니다. 쉬운 판단은 아니였을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휴업을 나가기 때문에 노조간부를 하게되면 생계투쟁을 못 나갑니다. 판단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행부가 비해고자로 짜여진 지도부였는데, 자신들 해고투쟁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해준 몇몇 사람들이어서 그 의리로 노동조합활동을 하고 그렇게 된 겁니다. 상당히 의리파였습니다. 
 
운동적인 관점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습니다.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진보신당선거운동원으로 보좌관 비슷한 활동을 하기도 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고 막 시작하는 단계였습니다. 
 
아이들보고는 자기 꿈이라고 했어요. 늘 꿈이라 희망이라고도 하고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트윗을 잠깐 할때도 보면 사진찍어서 ‘나의꿈, 나의희망’ 이랬고요. 들은 이야기지만 아이들을 잘 챙기면서도 엄했다고 해요. 천막농성하면서도 아이들도 데리고 오고, 부인도 데리고 왔어요. 

경과보고 내용에도 있지만 어머니가 요리를 잘해요. 우리가 천막농성을 하고 있으면 그 없는 살림에 추어탕이나 이런 것을 해서 바께스로 몇번 실어 날라주고, 전어철이 되면 부산사람들 회를 좋아하는데 “형님들 수고한다”고 사다주곤 했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강해보이는데, 그런 것을 보면 잔정이 많았던 친구였어요. 
 
복수노조애들하고 충돌하면 제일 앞장서서 속된 말로 치고박기도 했고요. 그래서 고소고발도 저하고 같이 당했어요. 딱 보면 멋있는 놈이었어요. 우리끼리는 그걸 경상도스타일이라고 하죠. 화통하고 화끈한거 말에요. 


반면, 잔정도 많았고, 유서쓰고 가는 것을 보면 생각외로 감성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리해고 끝나고 심리치료를 우리해고자들끼리 받았어요. 물론 저는 안 받았습니다만, 그중에 제일 걱정이 없었던 친구였다고 합니다. 

 
심리치료사들과 같이 치료를 받은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가장 우려스럽지 않은 부류, 등급을 여러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걱정을 안해도 되는 등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이 생긴 뒤 우리가 굉장히 당황스러웠죠. 오히려 아닌 사람들은 괜찮은데…
 
자꾸 해고되고 복직하는 가운데 생계는 어렵고 그랬다가 다시 의리로 노조간부를 하는데 생계는 책임져야되고 그러면서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도 그러더라고요. “우리아들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첫월급받아왔는데 40만원인가 받아왔더라고 하면서 아버님이 막 우시더라고요. “새끼, 나에게 얘기라도 하지…”하면서요. 아버지가 옛날에 우리 조합원이었거든요. 
 
김동관 : 아버님 다치신 곳은 괜찮으신가요?


한상철 : 퇴원하셨습니다. 일주일인가 입원했어요. 제가 직접보지는 못했는데 방패에 막 두드려 맞았답니다. 


 


이상준 : 열사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쌍용차도 그렇고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사회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란 생각입니다.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야만 가능할텐데, 내적으로는 노학연대, 노청연대 이런 연대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힘을 줄 수 있고, 그것만이 해결책이라 생각됩니다. 힘내십시오. 23일 노동자대회때 다시 뵙겠습니다.
 
한상철 :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 : 이상준(코리아연대집행위원장)
정리 : 김동관기자(진보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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