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노동인권영화제 2일차 프로그램에서 오전11시에 상영된 첫영화 <스와니>는 1989년 아세아스와니노조의 투쟁, 그집행부의 100일간 일본원정투쟁을 다룬 기록영화다. 영화제측은 <스와니>를 이렇게 소개했다. <1989년 이리(현 익산)자유무역지대의 아세아스와니는 스키장갑을 만드는 회사다.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10대 중후반,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었다. 회사는 갑자기 폐업을 하고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게 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정상가동을 요구하며 싸움을 시작하고, 더불어 4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아세아스와니 본사가 있는 일본으로 원정투쟁을 떠난다.> 영화가 끝나고 당시 아세아스와니노조위원장이자 현재 아세아스와니동지회회장을 맡은 양희숙씨와 영화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오두희씨가 관객과의대화에 나섰다. |
시대마다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건과 투쟁이 있다. 스와니가 했던 1990년 일본원정, 일본노동자들과의 국제연대가 시대를 바꿔놓지 않았을까. 영화는 아세아스와니노조를 만난 일본인의 진솔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20여년 전 저는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일본 시코쿠 카가와현의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 어느날 전노협진군가를 외치는 여성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국제연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그때 한국노동자들과의 만남이 제인생을 바꿔놨습니다.> 영화는 15년만인 2014년에 만들어졌다. |
오두희 | 영화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묻어두고 있는게 아까웠다. 아세아스와니노동자들이 투쟁을, 일본에서 투쟁했지만 그기간 맺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싶었다. 감독이 아니라 투쟁현장에서 취미삼아, 현장에서 공권력이 난리치는걸 알리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던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생각을 못했으나 이야기를 전달해야겠기에 영화제작을 하게됐다.
아세아스와니노조의 투쟁은 사람의 존엄성을 각성하는 투쟁 … 우리는 불우한 사람이 아냐
양희숙 | 투쟁은 1989년부터 1990년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역활동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셋을 낳아 평범히 살고 있었다. 감독인 오두희언니는 저에게 인생멘토였다. 그런데 영화를 만든다고, 제가 그동안 많이 투쟁하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아줌마로 산다는데 대한 마음의 빚이 있던 중에 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많이 흥분이 돼 있다. 인터뷰씬에서 질문의도보다 감정이 앞서고 울고불고 했지만 그렇게 영화가 완성이 됐다.
첫출발은 노조설립과 활동이었다. 단지 열심히 일을 하고 계획에 따라 인생을 살고 싶었던것이다. 하지만 팩스한장으로 일방적인 해고를 당했다. 어리고 경험이 없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수 없었지만 지역의 도움으로 싸울수 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지만 보고 느끼고 각성하면서 불쌍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처지는 그럴지라도 인간의 존엄성, 개별의 존엄성을 각성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불우하거나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각성이었다. 노동조합이 근로기준법에 의해 활동할수 있는것인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는데 대해 당시 젊은 우리는 대를 이어서 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쐐기를 박고자 투쟁했다.
실제로 1990년 아세아스와니노조투쟁이 언론보도가 많이 됐다. 언론에서는 아세아스와니자본이 <너희 나라 노동부도 가만히 있는데 왜 남의 나라까지 와서 설치냐>, <너희 나라가 못살아서 문제가 발생한것>이라는 등 망언을 일삼다가 3개월간 힘겨운 투쟁 끝에 <회사는 한국노동자들의 정신적,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한 점을 사과한다>고 협정조인식에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
관객질문 | 왜 목숨걸고 투쟁에 앞장섰는가? 왜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는가?
양희숙 | 이자리에 나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목숨걸고 투쟁했다>는 문학적 표현이다. 저는 너무나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났고 공부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것이 개인의 불우한 환경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개인이 노력하면 가능하고, 지금의 환경은 어쩔수 없으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위의 또래 아이들의 경우에도 공부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당연한 요구인데 탈의실에 가두고 문을 잠구고 학교를 가지 못하게했다.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으면 작업복을 입고도 학교를 갔지만 다음날이면 따귀를 맞았다. 그때 저 스스로 질문을 했다. 만약 나중에 결혼하고 낳은 아이가 노동자로서 같은 상황에 놓여서 <엄마,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해>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하는가. 도망가지마라. 부당한것은 부당하다고 이야기해라. 저는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할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목숨을 건것은 아니다. 실은 불법이 아니니까 국가로부터 혹은 단체로부터 도움을 받을수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에 가니 한국노동청에서 일어로, 팩스로 <저들은 불법단체 전노협소속이다. 도와주지 마라.>고 보냈다. 일본사장이 우리 면전에 그팩스를 읽으며 조롱했다. 우리는 일하고 싶다는 것 때문에 정상가동을 구호로 가졌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환경이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목격한 바 쉽게, 단순히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걸 알았다. 쟁취하는것 없이 돌아가면 우리가 당한 일들이 반복될거라고 생각했다. 죽어도 부끄럽지 않아야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투쟁한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것을 보고 느끼며 자연스럽게 들었던 감정이다.
오두희 | 죽었다. 죽을만큼 했다. 처음 이영화를 만들려고 인터뷰를 할때 느꼈다. 결혼해서 부천에 살고 있는 양희숙동지를 만나러 갔을때 가장 힘들어한건 당시 죽을만큼 노동해방을 위해 살아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현장에 있지 않고 가정생활을 한다는것이었다. 그러면서 인터뷰하는 내내 미안한것, 노동해방전선에 있지 않은것을 힘들어하며 토로했다. 지금도 느껴진다. 하지만 됐다. 그때 그렇게 했고 이제는 즐겼으면 좋겠다.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길 바란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나. 아세아스와니노조위원장으로서 책임을 졌다. 200명이 넘는 노동자를 죽을 만큼 책임졌다. 만족하지 못했지만 잘했던걸 전달하고 싶었다. 교과서적이지만 노동자는 하나다. 한국에 있든 일본에 있든 똑같다. 지금까지도 한일노동자, 전북지방과 오사카지방이 매년 봄가을 연대한다. 교과서적이더라도 진실인, 진리인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노동자가 세상을 바꾼다 …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실천한다
영화에는 일본노동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또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실천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교과서적이라고 하지만 그게 맞다. 영화<스와니>는 <노동조합이 세상을 바꾼다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지로, 현장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
관객질문 | 예상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보진 못할거라고 마음 먹고 왔다. 하지만 상상한것처럼 치열하고 격동하는 투쟁으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는데서 오는 불편함보다는 시대상황은 불우하고 어려웠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 교류, 교감하는 감정들이 지금보다 훨씬 좋다고 느꼈다. 저도 직장을 다니고 노동쟁의현장을 보지만 저는 사실 관심이 없다. 때때로 피로감만 느끼는 저를 발견한다. 코로나19시국이기도 하고, 그러한 전세계적인 질병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개인주의가 만연해있다. 인권이 좋아졌고 인본주의의 세상이 됐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제가 봤을땐 그렇지 않다. 허울만 그렇다.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세아스와니노조는 하나의 공동체적인 목표가 있기에 그렇게 투쟁할수 있었던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지점이다. 공동체적인 목표를 갖고 몇명이 됐든 뜨겁게 서로 껴안으며 함께할수있는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지나가버렸다. 그때보다 지금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느껴지는지?
양희숙 | 제가 아줌마로 살면서 지금의 삶에 근저리에서 만나는 아줌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목숨걸고 투쟁했던 노동운동의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혐오를 한다는데 놀랐다.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촛불에 나간다. 촛불은 나가는데, 이상하게 노동자들이 활동하는데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저주하는 말들을 한다. 아줌마로 살면서 가졌던 가장 큰 질문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지만 비난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혐오를 한다? 시대는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졌다. 그때는 뜨거움이 있었다. 공동체의식, 그때는 그게 그런지 몰랐지만 뜨거웠고, 함께 투쟁했고, 각성했다. 그러면서 한발 나아갔다. 지금은 그런것조차 없다. 물질적인, 교육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나아졌을지 모르겠다. 먹는것? 그때 저는 쌀 한 말 값이 없어서 공장에서 일한 돈으로 쌀을 사와서 가족들과 근근히 살았다. 교육? 기회도 없었다.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기회가 있다. 마치 풍요로워진것같다. 실제로는 더 냉담하고 무관심하고 잔인하다. 조롱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 있어서, 심지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 내는데 대해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을 느낀다.
아이셋에게 다른것은 앞장서서 뭘 하라고 이야기 하지 않지만, 지난주에 아들이 군대를 갔다. 요즘 20대 젊은 남성들이 가진 여혐이 우리 아들도 있더라. 왜 남자들만 군대를 가느냐는 등의 이야기가 치고 들어왔다. 그러면서 기성세대가 하는게 뭐 있냐고 했다. 그래서 해결해야 할건 앞으로도 계속 많다고 했다. 우리 이전의 세대는 전쟁이후에 처절한 삶을 살았고, 20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가 태어나서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살았다. 너무 치열하게 했지만 이것밖에 못했다. 미안하다. 네가 군대를 갈수밖에 없는게 미안하고, 이것밖에 못했다. 우리가 해결을 못했다. 하지만 외면할수도 없다. 너희들은 욕만 하면 끝이니. 그렇게 말했다. 요즘은 각계각층 사람들이 자기목소리를 내지만 진짜 애정을 갖고 내는 목소리는 없는것 같다. 스마트폰 저도 많이 보는데, 혐오와 분열이 많다.
아이들에게도 하는 이야기지만 사관만 똑바로 가지면 욕할게 없다. 역사를 똑바로 봐라.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당한 사람의 입장, 그들은 어떻게 했는지를 제대로 알면 중심을 잡을수 있다. 노동운동 조금이 아니라 전반에 걸쳐서 제가 절망하는것은 <목숨걸고 했는데 어쩌라고. 꼰대네?>라는 말이 많은것이다. 그때는 뜨거움이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해, 열악하고 불우하더라도 괜찮아 존엄성이 있으니까.>였다. 연대의식도 있었지만 지금은 교육적인 혜택, 복지도 조금 좋아졌고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더 나빠졌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 자식들 만이라도 누구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애정까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산다.
오두희 | 미안해하지 마라. 우리탓은 아니다. 만약 이영화를 지금 제작한다면 이렇게 만들진 않았을것 같다. 현장의 절박함은 바깥에서 볼때는 너무 날것이라 힘들거다. 하지만 속의 이야기가 진짜 그랬다. 그렇다더라도 지금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찍으라면 이렇겐 안했을것 같다. 지금보니 보이는게 많다. 여성노동자를 바라보는 눈이랄지, 일본사회의 가부장적태도랄지 그런데 보이는걸 보면 저도 많이 변한것같다.
관객질문 | 여성노동자들은 여전히 많은 타격을 겪고 있다. 여성노동자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양희숙 | 20대 아이가 둘, 10대 아이가 하나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요즘 사람들의 트렌드가 뭔지 알것같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저는 아이들과 이야기할때 너무 민감해서 이야기가 뜻과 다르게 이상한 쪽으로 결론이 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여성을 특화해서 이야기하는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여성, 남성 차별이 아니라 여성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많다고 생각한다. 21세기라고 하지만 결혼해서 보니 시댁문제가 심각하다. 200년도 전의 봉건적 사고방식을 요구받을때도 있었다. 남성도 그렇지만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 사회참여의 기회가 많아진데다 예전에 맡아온 일까지 하려니 몸은 하난데 힘들수밖에 없다. 결혼해서 아이낳고 직장생활 한다면 너무나 치열하게 돈벌기 위해 일해야하고 집에 들어오면 육아, 살림이 당연시 된다. 요즘 세대가 많이 바뀌어서 남성들이 많이 도와준다 하지만 <도와준다>이지 <함께한다>가 아니다.
예민하지만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 그것이 남녀차별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문제에 대해 남성, 여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1차원적이고 무식한 접근이디. 인간의 문제로 봐야한다. 사실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힘들다. 그리고 여성이 해야할 일이 좀더 많은 건 사실이다. 저도 나이가 있는 세대이니까 제가 젊을때는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순응을 했지만 딸을 키우면서는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살라고 가르쳤지 여성으로서,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다른 집들에서도 그랬을것 같다. 인간의 문제로 봐서 누가 힘들것인가는 서로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보이게 돼 있다. 자연히 도와주게 돼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해서 육아, 살림 여성이 더 잘하는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대화로 잘 풀어나가는 것으로 하길 바란다.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대화를 나누면 된다.
앞선 세대 노동자들의 역사적 경험, 불편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관객질문 | 저의 어머니였다면 우리 엄만 최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보고 배우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알수 있게 됐다. 그래서 미안함을 떨쳐버렸으면 좋겠다. 또 세대가 단절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함께 투쟁할수 있다. 서로 꼰대야, 너는 어려 하면서 반목하는게 아니라 나쁜 관리자들에 대해 단결해서 투쟁할수 있다. 당시 일본으로 원정투쟁갔을때 말도 안통하고 불안했을것 같은데 연대하러 온 사람들을 봤을때의 느낌을 더 생생하게 듣고 싶다. 또 감독님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가 궁금하다.
양희숙 | 일본 갈때 아무것도 없이 갔다. 전노협이라는 중앙조직이 있기 전에 전북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있었다. 오두희감독은 당시 <노동자의집>소장이었다. 아세아스와니의 노조설립서류 완성을 도와준 분이다. 각자 알고 있는 지식이 있지만 뭔가 이뤄내기 어려울때 상담을 해줬다. 그러한 도움으로 일본을 갔다. 가톨릭노동사목, 또 서울지역노동조직의 이름을 빌려서 일본을 간거라 누군가 나올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은 혈혈단신 아무것도 없이 간건 아니었다. 그조직들의 비호를 받아서 갔다. 우리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고, 언어는 안되고, 막연한 상태로 도착했음에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세상에 이런게 있구나, 이렇구나>하고 두려운 마음이 사라졌다. 안심했던것 같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오두희언니 이야기를 더 하자면, 우리는 10대, 20대 노동자들이니까 배가 많이 고팠을 때인데 <노동자의집>에 가면 오두희언니가 왔냐면서 밥을 해줬다. 지금은 굉장히 섬세한데 당시엔 털털했다. 여담이지만 한번은 위원장인 제가 스커트를 입고 회의를 참여했더니 오두희언니가 <바빠 죽겠는데 스커트를 입고 왔냐>고 했다. 존경하고 빚진 마음이다. 결혼해서는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리웠고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났다.
오두희 | 저는 당시 전북지역노동운동가였다. 스커트에피소드는 별거 아니다. 앉기 불편하니까. 일본을 다녀와서는 100일이지만 그들의 삶이 바뀌었다. 제가 지원을 했지만, 많은 노동자들을 겪었지만, 100일만에 사람이 달라진걸 보고 많이 놀랐다. 그래서 다들 민주노총 전북지역 사무활동가로 갔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무국에 지식인활동가들이 많았다면 전북지역은 현장출신 노동가들이 갔다. 그만큼 일본노동자들과 연대를 통해 굉장한걸 배운것 같다.
양희숙 | 그때는 일본사람을 퉁쳐서 쪽바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예의를 갖춰서 대하지만 그땐 그랬다. 특히 전북지역은 그런게 더 강했다. 쪽바리가 좋은 이미지도 아니다. 공항에서 일본입국하면서도 <쪽바리, 니들 왔어. 당연히 와야지.>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거지들 아냐. 당연히 도와야지.> 하면서 마음을 못열었다. 우리도 마음을 못열고, 저들도 마음을 못열고. 그런데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100일동안 바뀌었다.
언어가 안되는게 힘들었다. 감정이 오르다가도 통역을 거치면 달라졌다. 뜨거워서 <투쟁!> 하고 있는데 통역 하는 동안 식지않는가. 하려던 말고 통역을 하고 있으면 식어서… 그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정말 진지한게 느껴졌다. 지금 20대들은 예쁘고 젊긴 하지만 놓치는게 많다. 원정에서 우리는 얼굴 찌푸리는것 없이 차분하게 임했고 일본연대자들은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또 일본이면 다 부자인줄 알았다. 회사에 골프장, 테니스장도 있고 했지만 집을 가보면 우리와 똑같이 살고 있고 해고당해서 10년, 15년간 싸우고 있는 분들도 있었다. 우리만 힘든게 아니라 그들도 열악한 사람인데 뜻에 동의해서 함께 해줬다.
또 한가지, 오사카에 교포들이 많이 살고있는데 영화에 나온 김희원님이 말해주기를 일본사람으로 귀화하면 잘 살수도 있는데 귀화하지 않으면 명문대를 나와도 차별받는다고 했다. 김희원님이 교수이지만 집이 없었는데, 전세였다. 집을 왜 안샀는지를 물었더니 부모가 일제강제징용으로 끌려와서 자신은 2세라고 했다. 하지만 민족의식이 강했다. 언젠가는 돌아가려했기 때문에 이곳에 귀화하고 집을 얻어살면 돌아가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가고싶어했다. 일본 사회안에서 2중으로 차별받는 교포들의 삶은 젊은 나이로 볼때 신세계를 본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지치지 않고 싸우는구나하고. 지금에와서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이었다. 진실을 봤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하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게 죄송하다.
오두희 | 아세아스와니노조 기록영화를 상영관에서 본 것 처음이다. 멋있다. 불편하더라도 그시대의 절박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잊어선 안된다. 역사라는게 뭘까.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 않겠나. 영화를 상영해줘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