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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국제포럼] 꾸바혁명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장

 

쿠바철학연구소 맑스주의연구의장 이자벨 모날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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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코리아국제포럼의 일환으로 23일 오후2시에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이상준공동대표의 사회로 서교동 북카페정글에서 꾸바철학연구소 맑스주의연구의장 이자벨 모날과 18명이 모여 모날의 꾸바에 대한 기본설명과 청중들의 질의에 모날이 응답하는 방식으로 2시간 30분간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자벨 모날은 “우선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다”며 “꾸바에 관심을 가져주고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꾸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말한 뒤 “첫번째로 꾸바혁명의 변화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꾸바혁명은 미국과의 대립에서 발생

 

모날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3번째 독립을 위한 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신식민지 꾸바의 안타까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8세기말부터 미국은 공공연하게 꾸바에 대한 침략의지를 밝혔다”며 “1823년 먼로주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꾸바혁명은 미국과 꾸바의 대립에서 발생”했다며 “꾸바 민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탄압과 식민정책에 반대해서 싸웠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꾸바와 스페인과의 분쟁이 끝나고 미국이 개입한 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장력이었다”고 지적하며 “스페인을 몰아낸 후로는 미국의 무장력이 꾸바를 좌우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적 측면에서는 꾸바의 천연자원에 대한 미국의 봉쇄”가 있었고 꾸바에 있는 “미대사관은 결국은 미국의 권력을 꾸바에서 사용하기 위한 도구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계가 명확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꾸바에서 우리가 처한 조건을 발전시키는데 일정한 기능을 했다”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피델 카스트로 무장투쟁 노선 제시

 

그는 “사실 무장투쟁이라는 개념은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제대로 발전되었다”며 “진정한 해방을 위해 진정한 꾸바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 없이는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노선을 카스트로가 제시”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이 바로 1959년 1월 꾸바혁명의 기지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바로 이때부터 꾸바혁명과정의 어떤 한가지 결정이 있을 때마다 미국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했다”고 “그렇기때문에 피델 카스트로의 전략은 항상 그것보다 멀리 보고 멀리 사고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혁명첫해에 우리가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며 “민중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농지개혁과 국유화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국유화도 여러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부르주아계급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국유화시켰지만 나중에는 미국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국유화시켰다”며 “결국 이 과정은 계급투쟁의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꾸바혁명이 진행되었던 과정은 거리에서 진행되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꾸바 사회주의 제창

 

그는 “미국의 여러가지 압박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석유였는데 “꾸바는 소련을 통해서 석유를 받아쓰고 있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석유수입도 막히면서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어 “군사적 측면에서는 1961년의 군사적 위협이 심각”했고 “당시 미국이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꾸바를 침략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꾸바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며 “미국은 다른 나라와 꾸바의 외교를 단절시켜 꾸바혁명을 저지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그 당시 상황을 부연설명하며 “지금의 라틴아메리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며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정부는 반꾸바노선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소련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사회주의는 망했다며 꾸바의 붕괴를 노골적으로 선전했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1961년 미국의 군사적 압박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피델 카스트로는 꾸바의 사회주의를 이야기했다”며 “그 당시 사람들은 이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계속해서 “이때부터 미국의 경제봉쇄가 시작되었고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도 봉쇄하는 말그대로 억압 그 자체였다”며 “이때부터 꾸바의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몰락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시대

 

모날은 “꾸바 사회주의의 발전은 꾸바의 역사, 꾸바 민중들의 준비정도에 따라 발전해 왔다”며 “이 과정에서 사실 오류도 정말 많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 심화되었다”며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인 새로운 조건은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였다. 이렇게 사회주의 우방국가가 무너지면서부터 경제가 무너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실 지난 세기가 참 어려웠다고 기억하고 있고 반면 그것을 특별한 시대라고도 부른다”며 “특별한 시대라는 것은 소련과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의 가치를 잃었을때 라틴아메리카가 아직 진보라고 평가할 수 없는 발전단계를 말한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이 단계에서 꾸바의 경제는 말할수 없이 어려워졌다. 최저의 최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중들은 계속 저항했고 그리고 생존의 위기속에서 한걸음씩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래도 다행히 교육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했고 의료시스템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며 “의료의 질을 평가하자면 80년대와 비교하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 원칙은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려움속에서도 국제연대 적극 지원

 

모날은 “이 과정에서 또 한가지 강조점은 꾸바가 어려운 조건에 있었지만 제3세계 나라들에게 국제연대를 전적으로 표명했다”며 “그 대표적인 것이 60년대 알제리, 70년대 앙골라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주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꾸바혁명의 과정에 있었던 혁명의 가치중의 하나이고 꾸바혁명이 전진하면서 기여한 것이 국제주의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꾸바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

 

모날은 “현재 꾸바 경제는 매우 어려운 조건에 있다”면서 “2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스스로 범한 오류이고, 두번째는 세상이 변하는 것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경제모델의 현대화”라고 말하며 “정말 그동안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국가가 나서서 모든 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 그냥 앉아 있느면 문제를 풀어줄거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서 우려를 제기했다.

 

계속해서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꾸바는 외부에 의존하는 경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며 “혁명초반에 있었던 미국과 연관된 산업들을 분리시키면서 독립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는데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는 당시 그와 관련된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과의 단절을 할 수 있었던 힘이 소련에서 많이 왔는데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초에 소련 붕괴 이후에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국과 다시 관계를 맺겠다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라틴아메리카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꾸바가 앞으로 나아갈 전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며 “과거 꾸바가 어려울 때 라틴아메리카가 지금과 같았다고 생각하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지금의 라틴아메리카가 진보적인 정권이 집권하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한계가 있더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진보하고 있는 과정에서 꾸바가 라틴아메리카 차원의 협력을 실시하고 이 속에서 함께 공동의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발제를 마쳤다.

 

발제를 마친 후 청중들의 질문에 모날이 답하는 순서가 진행되었다.

 

 

Q – 문화적 측면에서 질문을 하고 싶은데, 체 게바라의 사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되고 있는데 그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꾸바내에서 체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A – 체 게바라의 가장 유명한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고르다였는데 몇년전에 죽었다. 당시 고르다의 생각은 몇개의 중요한 사진에 대해서는 저작권에 대한 발언을 했다. 물론 어디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존경하는 의미와 추모하는 것은 괜찮다. 꾸바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사랑한다. 혁명을 추구하는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체 게바라의 삶과 정신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체 게바라의 매력을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혁명에 대한 열의, 인간적이고, 개방적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 같다. 민중과 연결되어 있는 것뿐 아니라 이론가이자 인텔리로서 모든 면모를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체 게바라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나도 인생에서 혁명 초기 3번정도 체 게바라를 만난적이 있다. 얘기를 하다보면 내가 평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혁명이 시작된지 1달이 되는 시점에 새벽2시까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에는 혁명초기다 보니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고 조직이나 혁명의 방향도 어떻게 해야 하나 등 여러가지 고민과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냥 와서 그런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그런 시간 자체가 인상적이었다. 제가 체 게바라를 회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혁명적 힘의 단결의 중요성이다. 나는 당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체 게바라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정말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것도 많이 있다. 당시에 나에게 하고싶었던 체 게바라의 메시지는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Q – 경제와 관련해서 국가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것이라는 의식을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A – 아직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몇년전부터 시작된 변화중에 꾸엔따프로비아(사회적 규범)에 대해 말하자면 국가가 정해놓은 예전과 달리 지금은 협동조합이나 지방정부에서 주민들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중이다. 사람들은 정해놓는 규범자체에 매우 만족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런게 있어야 질서있게 사회가 움직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정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논쟁이 이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는데에서 자신들 본인이 직접 참여하는데서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또하나 위험한 것은 다른 나라와 처해진 조건이 다른 속에서 자본주의의 물결이 침투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업분야에 있어서는 지금 진행중인 딱 하나의 길이 있다. 변화자체는 느리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코리아나 중국이나 베트남과 다른 꾸바는 농업자체의 역사가 길지 않다. 베트남에서 찾은 대안이 꾸바에서는 대안이 될 수 없는 경우 많았다. 그래서 반드시 꾸바농업만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란 라틴박스라고 하는 큰 땅만 연결되어 있는 모습만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은 사탕수수를 경작하는데 사용하는 땅이었다. 그당시 토지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업인이 아니라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였다. 꾸바 혁명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것이 협동조합이었고 그 차원에서 농업을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협동조합만으로는 모든 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꾸바 혁명 초반에 농지개혁은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 협동조합들도 이것에 동의했었다. 어쨌든 꾸바의 대부분의 토지는 국가소유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자본의 소유에서 국가의 소유로 변한 것이 아니냐, 농민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고나서 그것이 좋은 해결책이었다고 좋아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솔루션이라해도 진행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완벽하지 않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꾸바농업의 현실을 보여준다. 경작을 원하는 농민들에게 무료로 토지를 공급하는게 아니라 그냥 조건을 마련하는 수준에서 국가가 일부를 지원하는 측면에서만 하기때문에 이속에서도 가난이 계속 이어지고 대기업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토지를 국유화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않은 기간과 내용이 있었다. 나의 친구들중에도 지금 꾸바가 하는 것을 보면 90년대 그 어려웠던 시기로 돌아갈 것 같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그 친구에게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절대 그때처럼 돼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련과 동구의 붕괴한 그때와 지금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3년전부터 시작된 농지개혁이 그나마 긍정적인데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없어졌을텐데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지 않는 점이다. 변화가 중단되는 과정 자체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 자본주의 유입의 위험성이 존재하고 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꾸바의 경제개방이 대외협력에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면서도 신중함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도 동시에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협동조합이나 국가소유의 공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다 쉽지가 않다

 

Q – 자본주의나라에서 최근 북코리아의 지도자가 바뀐 문제와 꾸바의 정권 계승문제에 대해 독재정권의 연속이라고 보는데 꾸바 민중들의 신뢰정도와 신뢰의 근거는 무엇인지?

 

A – 북코리아와 꾸바에 대한 질문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꾸바는 세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제가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의 관계는 형제인 것이 초점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를 지도하는 것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더 중점으로 봐야한다.

 

내가 오히려 아쉬운 점은 라울이 먼저 더 일찍 혁명에 오랜기간 직접적으로 참가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꾸바 민중들은 오히려 피델 카스트로 이후에 라울 카스트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능력을 인정한 것이고 혁명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한 것이었다. 물론 라울과 피델도 100%는 아니다. 둘이 모두 일치했다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 갈등도 있었다.

 

피델은 정말 좋은 정치인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나 혁명을 하는 노하우도 많았지만 가지고 있는 신념자체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피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후세대가 살아가는 그때까지 다 살수가 없다. 물리적으로 수명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저는 사실 피델이 있어서 꾸바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한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독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선견지명과 같은 결단력이나 똑똑한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꾸바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라울은 정말 뛰어난 사람이긴 한데 오히려 경영학적면에서 뛰어나다. 시스템적으로 일을 하고 조직도 정말 잘 한다. 라울은 꾸바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분야인 국방책임자였기에 신념이나 능력에 대해 제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라울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당내부활동을 깊이있게 더 많이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라울은 지금 일을 잘 하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꾸바에 필요한 변화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민중들도 라울이 지도자로 있는 것을 좋아한다,

 

북코리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라틴아메리카에 있어서는 이것을 세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북코리아가 걷고 있는 길도 잘 이해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것은 아닌데 좀 더 다른 측면에서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에 대한 평가도 성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Q – 라울도 나이가 많은데 차기신세대지도자가 있는지?

 

답변 – 정말 중요한 문제다. 이 질문을 들으면 80년대를 생각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나 소련의 국가수반이 피델이후에 누가 수반이 되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당연히 라울이라고 생각했다. 피델은 90년대 이후 10년동안 후계준비를 해왔다. 다른 나라에서 라울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꾸바 민중들은 라울을 지지, 라울의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 90년대부터 10년 넘게 후계준비를 해왔다. 좋은 의미의 권위를 가지는 것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후계자 지목이 세습이나 독재가 아니라 꾸바 민중들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그 과정에 젊은 정치지도부의 활약도 있었다. 근데 지금은 해결방법 잘 못찾겠다.

 

사실 그 당시 피델에서 라울로 넘어가는 과정은 정치적 스캔들이었는데 부패나 비리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이양이 진행되어 외부에서는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특히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문제는 지금 라울 이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라울이후의 후계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허나 2년전부터 있는 꾸바 사회를 보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신중하게 보고 있다. 나는 라울이나 안단트레라든지 그 측근들과 친했다. 그 부모님들도 알고 지냈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국가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만 하면 안되겠다. 피델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적이었다. 실제 진심을 담아서 피델같은 정치인이 있다면 부정부패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계를 준비중에 있고 후보들도 여러명 지목되고 있고 한두명이 중요한것이 아니고 여러명이 힘을 모으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정보라든지, 판단이라든지, 개인적인 한계들이 있다.

 

또하나의 강조점은 안타깝게도 꾸바 젊은층의 정치적 관심이 낮다는 것있다. 이건 일반적인 것이고 예외도 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옆사람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혁명적인 삶은 맑스주의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정과 관심, 탐구열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혁명을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친구, 나의 가족이 고통받고 불평등이 있는 것에 대해 왜 이러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농촌에 갔을때 또래들이 지주 밑에서 하루종일 농사지으며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화를 냈다. 지금 사실 제가 살던 시기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정말 컸다. 실제 앙골라에 문제가 있다면 거기에 가서 싸우기도 했다.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예절바르나 문제는 예전과 같은 혁명적 열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이야기한 모든 내용을 꾸바인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얘기하는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Q – 정치지도자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

 

A – 대답하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첫번째는 청렴해야 한다. 그건 솔직, 정치나 경제에서 부패나 사리사욕 채우면 안된다. 두번째는 능력이 있었야 한다. 똑똑함이 없어서는 안된다. 특히 능력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것이다. 꾸바와 같이 미국의 봉쇄가 진행되는 속에 있는 경우는 더 그렇다. 세계에 대한 이해력도 있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하며 폐쇄적이어서는 정치가가 될 수 없다.

 

Q – 꾸바의 젊은세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A – 젊은이들의 고민은 겉모양, 치장하거나 옷모양 이런 것인데 나는 이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만 보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꾸바에서 살아가는 조건이 매우 어렵다. 이걸 이해해야 한다. 옷이나 음식 자체가 여기처럼 충분한 조건이 아니다는 것 이해해야 한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젊은이라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 수 는 있으나 꾸바의 현실은 이런 것만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조건이 있고 옷이나 음식같은 것은 자기가 가지만 다른 옆사람이 못가지는 차별문제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지금보다 훨씬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만약에 꾸바가 자본주의로 돌아섰을때 심각한 문제가 생길지에 대한 의식자체가 없는 것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다. 젊은이들이 무상교육이나 무상의료와 같은 사회주의시책을 자본주의에서도 당연히 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부 젊은이들이 배고프다, 가난하다고 정권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라틴아메리카 다른 국가 어느곳에서도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Q – 꾸바 대학생들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A – 아시다시피 모든 대학은 무상교육이다. 대학뿐만아니라 모든 교육자체가 무상이기 때문에 교육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제가 손녀가 있는데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춤도 추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계속 손녀딸에게 충고하는 것은 의식수준을 높이라는 것이다. 꾸바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게 깊게 하라는 것이다. 손녀가 국가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런 비판이 옳은 것도 있는데 거기서 그치고 만다.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외부의 시선으로 비판만 하는 것이 안타깝다. 딸은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서 활동하는데 그렇게 활동하고 만다. 지금 보이는 단체의 모습이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냥 이렇게 물한잔만 놓고 밤새 토론하고 그런 문화가 사라졌다.

 

Q – 남코리아에서 살다보면 제국주의, 자본주의 반대하는 여러 나라들의 소식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다. 그런 부분들을 좀 이야기해 달라.

 

A – 꾸바혁명초기부터 전세계의 단결과 국제연대라는 개념은 중요한 가치중의 하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리아를 도와서 반이스라엘투쟁을 한다든지, 이티오피아의 독재정권을 반대하기 위해 꾸바인들이 간다든지, 앙골라에 가서 혁명투쟁에 참가한다든지, 이같이 멀리 가기도 했지만 라틴아메리카운동 자체에 전반적으로 꾸바가 참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고 특히 게릴라의 형태로 많이 이루어졌다, 또하나 인상깊은 것은 베트남전인데 북베트남에서는 외부에서 도와주는 것을 경계했는데 꾸바인에 대해서는 경계없이 고맙게 국제연대를 받아들였다.

 

또 하나는 체르노빌사고당시 아이들에게 지지활동을 많이 했었고 지금도 물자나 여러가지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또 아프리카 반식민주의투쟁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카메론이라든지 다양한 나라들이 있었다.

 

국제연대가 지금은 아주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고 제일 자랑으로 여기는 분야가 의료분야인데 의사들이 다른 국가에 가서 봉사도 하고 꾸바에 의대를 설립해서 전세계에 있는 의료기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똑똑한 학생들이 꾸바에서 공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것 이전에도 아프리카와 제3세계에서 쿠바에 교육받으러오는 제3세계 학생들이 많았다.

 

사실 또하나 강조해야 할 것이 피델이 많은 시간을 소요한 것이 바로 토론하는 것이었다. 토론도 민중들과의 소통도 있고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도 만나 그 나라의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토론도 있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꾸바가 있는 것이다. 특히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운동에서 경험과 교훈을 많이 흡수했고 살바도르를 비롯해서 중남미에서 벌어지는 많은 변화들이 꾸바로 흡수됐다. 또 많이 있다.

 

Q – 미국과의 적대적인 상황에서 전쟁이나 전쟁직전의 심각한 대결상황에서 꾸바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싸울수 있는지? 미국의 꾸바에 대한 심리전과 경제봉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A – 우선 꾸바의 조건을 잘 봐야 하는데 꾸바의 사회주의와 민족해방혁명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혁명을 하는 것은 민족해방을 향한 혁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미국이 한번 꾸바에 대한 점령을 하면 미국이 절대 그걸 놓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 대결상황이 오면 젊은이들도 당연히 반제반미투쟁을 할 것이다. 물론 젊은층중에서는 재빨리 미국으로 피신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층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는 그런 사람은 없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민중들의 주권이나 가치나 해방을 위해서는 혁명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다라고 느낀다. 지금 미국에는 다양한 고립압살정책의 일환으로 여론을 조작하며 꾸바는 망했다고 하지만 혁명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그 당시 꾸바 혁명이 망한후에 3일안에 꾸마혁명가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제가 좀 비판적으로 말했던 젊은이들도 자기 부모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할리가 없다. 꾸바를 떠난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그 사람들도 미국이 꾸바에 들어오는 것을 결코 찬성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세력의 반꾸바정책에 동의할 꾸바인은 외부에도 없다.

 

군사적 충돌만큼 힘들게 만드는 것이 민족내부의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국방이라는 것이 잘 지켜지려면 민중들이 한명한명 들고일어나야 한다. 기술적으로 전쟁한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과정에서도 그래왔고 나중에라도 군사적 충돌이 있을 때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각자 처지에서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반제정신을 실현하는 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희망은 꾸바 경제가 어려우니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부시시절과 비교해서 오바마는 직접적인 경제봉쇄보다 교활하고 내부분열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미국 거주 꾸바인들은 반드시 꾸바를 증오해서 나간 사람들이 아니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간 것이다. 꾸바에 가족들이 있는데 가족과의 연락을 막자 반감이 커지고 그 사람들이 유권자가 될 것을 우려해 미국에서 정책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사실 고립압살정책을 말할때 미국만큼 심각한 것은 유럽연합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꾸바봉쇄에 일조하고 있다.

 

꾸바의 경제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중국인데 예전부터의 경제관계 강화하고 러시아와 관계를 회복중이고, 베네수엘라 등 다른 나라와의 경제협력관계를 회복중이다.

 

민중들의 삶의 조건이 경제정책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꾸바민중에 의거해서 나아가려는 것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잘 살려야 한다. 제국주의세력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미디어에서 곧 망한다고 해왔어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그것이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도 외부에서 선전하는 것 만큼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고 이것도 나아지고 있다.

 

Q – 꾸바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국방력 강화를 앞세우는 그런 정책에 대해 꾸바민중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모날선생님은 어떻게 보는지?

 

A – 꾸바와 북코리아는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전략이 여러가지인데 북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면 북에 대한 군사전략이 일반화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남과 북의 문제는 평화협정을 통해서 미제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꾸바는 그런 입장이 아니다.

 

북의 핵문제에 대해 비판이 있지만 꾸바는 핵무기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비판 없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미국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 뒤에는 중국이 있기 때문이다. 중동에 대해서도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호주라든지 다른 곳에서 확장되는 미군기지들도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한다.

 

북코리아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김일성에 대한 것이다. 살아있을 때 꾸바와 북코리아의 관계가 돈독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전세계에서 존경할만한 사람 중 한명이 김일성이라고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코리아전이 발발했을때, 그것이 미국의 전략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60년대 꾸바혁명초반에 북에 대한 전략을 꾸바에 적용하려고 했다. 미국은 내부문제를 먼저 만들고 꾸바에서 미국을 침략하도록 유도하고 속임수를 쓴다. 대표적인 예가 코리아전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에 여론조작. 미디어장악. 사건조작, 유도전술 등 북코리아에 비판적인 분위기 만들어 왔다.

 

피델은 코리아전을 통해서 교훈을 얻었지만 관타나모기지에 대해서는 대항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 계속해서 미국이 꾸바에 대해 왜곡할 때에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보같이 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코리아전 교훈 통해 신중하게 대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이후 참가자들의 간단한 소감발표와 함께 모날의 마지막 발언으로 간담회를 모두 마쳤다.

 

모날은 마지막 발언을 통해 정치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치의식이 어떻게 보면 나무같기도 하다”며 “정말 잘 가꾸어야 한다” “물도 줘야 하고 햇볕도 바람도 필요하고 뿌리깊고 단단하게 자라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새로운 배울 것들이 나온다. 계속 수정해야 한다. 실패할 수 도 있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제4회코리아국제포럼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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